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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도 분명히 그의 그림을 좋아했을 것, 로이 리히텐슈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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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도 분명히 그의 그림을 좋아했을 것, 로이 리히텐슈타인
  • 김서진 기자
  • 승인 2021.02.18 10:1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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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는 소녀 Crying Girl /flickr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팝 아티스트인 로이 리히텐슈타인은 20세기 후반, 가장 영향력 있고 혁신적이었던 예술가 중 하나였다. 앤디 워홀, 재스퍼 존스 등의 예술가들 사이에서 그는 새로이 발전한 미술 운동의 주도적인 인물이었다. 그의 작품은 주로 인기 있었던 광고와 만화책 그림에 영향을 받았으며, 신문의 조잡한 인쇄 형식을 모방한 스타일로 만들어졌다. 그의 그림은 미국 미술계에 활기를 불어넣었고 현대 미술의 역사까지 바꾸어 놓았다. 

그의 성공은 곧 5,000여개 이상의 그림, 판화, 조각, 벽화 등의 작품들로 이어졌다.  아방가르드 스타일의 새로운 비주얼적 화풍을 개발했으면서도 대중성과 인기를 끌었다는 점이 무엇보다 독특하다. 당시에 일상품, 만화, 광고 등의 소재를 사용한 것이 당대 업계에서는 반(反)예술 계열로 보이게 했지만 사실은 정보 사회의 아이콘을 작품에 표현한 것이었다. 
 

차 안에서 In the Car /flickr

그는 팝아트를 '미국 그림'이 아닌 '산업 그림(Industrial Painting)'이라 묘사했는데, 그의 작품에서 색채 이용은 소비 사회의 특성인 대량 생산의 속성을 극대화하는 장치로 쓰였다. 대량 복제가 일상화된 사회에서 신문이나 광고는 표준화된 공정을 거치는데, 모든 색의 기본이 되는 삼원색을 적절히 혼합한 것이 그 공정이다. 리히텐슈타인의 작품 또한 인쇄물을 복제하는 과정에서 삼원색이 강조되며, 이것은 곧 현대 산업 사회의 현실을 반영한다. 

로이 리히텐슈타인은 만화책과 광고에서 이미지를 빌려 일상적인 사물, 예술적 스타일을 구현해 작품을 만들며 의미있는 경력을 쌓으며 앤디 워홀 같은 팝 아티스트들과 더불어 팝아트 운동을 이끈 사람이기도 하다.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일생 

로이 리히텐슈타인 /flickr

어릴 때부터 과학과 만화책에 관심이 많았던 리히텐슈타인은 예술이란 것에 익숙했다. 피아니스트였던 어머니를 둔 리히텐슈타인과 그의 누나인 레니는 박물관과 콘서트 등 어렸을 때부터 문화 활동을 접할 수 있었다. 리히텐슈타인은 어렸을 때부터 예술적인 능력이 있었으며 10대 때부터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만들고, 미국 자연사 박물관과 현대 미술 박물관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1937년 파슨스 디자인 학교에서 수채화 수업을 받았고, 1940년에는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서 미국의 현실주의 화가인 레지널드 마쉬와 함께 공부하기도 했다. 리히텐슈타인의 초기 예술적 우상은 렘브란트, 도미에, 피카소였으며 그가 가장 좋아한 그림은 현대 미술관에 장기 대여로 전시되고 있었던 피카소의 '게르니카'였다.

그러나 1943년 일어난 제2차 세계 대전은 그의 예술 공부를 잠시 중단시켰고, 1949년 그는 미술 석사 학위를 받고 졸업했다. 그는 8년 동안 오하이오에 머물며 처음에는 교사로 일했다가, 나중에는 가구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다른 아르바이트를 꾸준히 했다. 
 

벤데이닷 기법이 보이는 행복한 눈물 Happy Tears /flickr

1950년대 초, 그는 그림 연재 작업을 시작했고 1960년에 그는 럿거스 대학교에서 강의를 시작했을 때 이 대학의 교수였던 앨런 캐프로를 만나며 팝아트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된다. 1961년, 리히텐슈타인은 그의 첫 팝아트 중 하나인 '이것 봐, 미키!'를 그린다. 이 작품은 만화 캐릭터를 사용했으며, 검은 윤곽선과 원색 사이를 채우는 '벤 데이 닷(Ben-Day dot)'기법을 의도적으로 모방한 것인데 이 작품은 나중에 그의 경력에 큰 전환점이 된다. 

벤데이닷 기법(망점)은 리히텐슈타인이 직접 점을 찍으며 드로잉하고 채색한 것이라는 설도 있고, 구멍이 뚫린 판을 사용해 색점들을 만들어낸 기계적인 작업이라 하는 설도 있지만 확실한 건 아니다. 다만 작품에 대해 어떠한 자신의 개성의 흔적도 드러내지 않은 팝 아티스트의 중립성이 돋보인다.
 

절망 Hopeless /flickr

1960년대의 상업 예술은 예술가들에겐 경멸의 대상이었고 1950년대 초 추상표현주의가 떠오르면서 당시의 서사, 장르 회화는 비평가들과 수집가들 사이에서 천대를 받게 된다. 리히텐슈타인은 그의 대표적인 스타일을 찾기 훨씬 전, 예술과 사회에 스며들어 있던 여러 관습과 기교에 주목했다.

리히텐슈타인은 미국의 역사에서, 민속에서 예술적인 소재들을 찾았고 그는 그 주제들로 초기 예술에 경의를 표하는 스타일의 그림을 그렸다. 그는 잭슨 폴록이나 다른 예술가들이 했던 것처럼 추상적이면서 주제 없는 캔버스를 그리는 대신 만화나 광고에서 이미지를 따 왔다. 

1962년 리히텐슈타인은 뉴욕 카스텔리 갤러리에서 단독 전시를 가진다. 그의 모든 작품들은 쇼가 열리기도 전부터 영향력 있는 수집가들이 줄을 서서 구매했으며 1963년 리히텐슈타인은 그의 생에에서 가장 잘 알려진 두 작품을 만들게 된다. 다름아닌 '물에 빠진 여자 Drowning Girl'와 '꽝! Whaam!'이다.

둘 다 DC 코믹스를 각색한 것으로, 특히 '물에 빠진 여자'는 기존의 코믹 아트로 팝아트 작품을 만들고자 했던 그의 접근 방식을 알 수 있다. 그는 극적인 연출을 위해 원본의 이미지를 잘라냈고, 원작 만화에 나오는 텍스트보다 더 짧고 직접적인 텍스트로 표현했다. 
 

TATE에 걸린 '꽝!' 을 감상 중인 관람객 /flickr

그의 작품은 앤디 워홀 때처럼 사람들에게 예술의 본질과 해석에 대한 의문을 일으켰다. 일부 사람들은 그의 대담성을 칭찬했지만, 또 일부 사람들은 그의 작품이 이미 존재했던 작품들을 공허하게 베낀 것에 불과하다며 비난을 했다. 잡지 '라이프'는 1964년 '그는 미국에서 제일 나쁜 예술가인가?'란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그의 작품에 감정적인 요소가 적었던 것이 예술가의 감정적 호소를 드러내는 것이 특징이었던 추상표현주의에 대한 모욕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어쨌든 그의 성공은 그의 삶에 중대한 변화를 주었으며, 예술 세계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계속 발견할 수 있게 했다. 1964년 그의 명성이 더 높아지자 그림에만 집중하기 위해 럿거스의 교수직을 사임하고 난 후 그는 자신의 그림 작업에만 몰두했다. 리히텐슈타인은 만화뿐만 아니라 세잔, 몬드리안, 피카소의 유화와 정물화를 재해석한 벤데이닷 기법으로 만화 형식의 '아를의 반고흐의 방' 작품을 만드는 등 예술을 자신의 작품에 차용하기도 했다. 
 

아를의 반고흐의 방 Bedroom at Arles을 실제 세트장으로 구현한 모습 /flickr

그 후 리히텐슈타인은 그동안 시도하지 않았던 조각 작업에 들어갔으며, 작업에는 산업용 또는 '비(非)미술용'재료를 썼다. 더 성장하고 싶었던 그는 자신을 유명하게 만들었던 만화 소재들에서 벗어났고, 1970년대 제작된 그의 작품들은 입체주의, 미래주의, 초현실주의, 표현주의의 집합체였다. 그의 팔레트는 삼원색에서 빨강, 노랑, 파랑, 검정, 흰색 등 다양하게 늘어났으며 그는 사진을 합성하고 겹치고 조각내어 다시 합쳐 작품을 제작했다.

리히텐슈타인은 뉴욕 사우샘프턴에 스튜디오를 차리고 남은 여생을 그곳에서 지낸다. 1970년대 후반 그의 스타일은 점점 초현실주의로 변했고, 그는 오랜 관심사였던 예술적 스타일에 대한 개념을 계속 탐구했다. 고전 건축, 입체주의, 초현실주의 등의 형태와 기술을 재해석한 그림을 그렸고 90년대 들어서는 '인테리어 시리즈' 등을 통해 평범한 미국의 환경을 표현한 작품들을 만들었다. 

그는 살아 있는 동안 많은 다큐멘터리 영화에 출연했고, 미국 대통령 선거 운동을 포함한 연예인들이 등장하는 포스터를 작업했다. 리히텐슈타인의 벽화는 지금도 독일 뒤셀도르프, 이스라엘의 텔아비브, 뉴욕 시 곳곳에 존재한다. 1997년 8월, 리히텐슈타인은 폐렴에 걸린 후 9월 29일 73세의 나이에 뉴욕에서 질병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사망한다.


그의 작품 

이것 봐, 미키! Look, Mickey /flickr

1950년대 후반, 1960년대 초반에는 많은 미국 화가들이 만화의 이미지와 모티브를 따와 자신의 작품에 각색하는 경향이 있었다. 리히텐슈타인도 그 중의 한 명이었고, '이것 봐, 미키!'는 그의 초기 팝아트 작품의 시초라 여겨지는 작품이다. 

1961년, 리히텐슈타인은 만화 이미지와 광고 프린트의 형식을 이용해 '이것 봐, 미키!'란 제목의 첫 팝아트 작품을 만든다. 이 작품에는 작은 일화가 있는데, 그의 아들이 미키마우스 만화의 캐릭터를 가리키며 '아빠는 저렇게 그릴 수 없지?' 라 했던 말에 자극을 받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것 봐, 미키!'는 그의 첫 비표현주의 작품 중 하나이며, 처음으로 말풍선과 만화를 소재로 사용한 작품이기도 하다. 작품 곳곳엔 연필 자국이 보이며, 캔버스에 오일 페인트를 바르기 위해 플라스틱으로 된 브리슬브러쉬를 썼다. 그가 죽었을 때 '이것 봐, 미키!'는 그의 획기적인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공을 가진 소녀 Girl with Ball /flickr

리히텐슈타인이 1961년 그린 이 그림은 미국의 건축가인 필립 존슨이 수십 년간 소장하고 있다가 모마(MOMA)에 기증하면서 지금까지 전시되고 있는 작품이다. 초기 팝아트 작품 중 하나이며 모티브는 수십년 동안 발행된 신문 광고에서 영감을 받아 코믹스 컨셉으로 그린 것이다. 첫 단독 전시회에 출품되었으며 시사 잡지인 '뉴스위크'에도 실렸다. 

'공을 가진 소녀'는 수영복을 입은 여성이 빨간 줄무늬의 비치볼을 들고 있는 모습을 그렸다. 리히텐슈타인은 익숙하면서도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주제에 대해 자신의 스타일을 섞어 그 자체로 단순하면서도 매력있는 작품을 만들었다. 원색의 벤데이닷 기법을 사용해 제작했으며, 그의 작품을 재작업하는 과정은 일명 '공제(빼기)에 의한 추상화'로 설명된다. '공을 가진 소녀'는 작업 과정에서 원본의 모든 특징이 단순한 그래픽 요소로 축약되었으며, 그림의 2차원적인 면에 집중함으로써 실제보다 더 왜곡되어 보이게 그렸다. 
 

피카소의 비치볼을 든 여인 Bather with Beach Ball /flickr

예술 역사가인 다이앤 왈드먼은 '공을 가진 소녀'를 두고 단순하고 대담한 방식으로 휴가라는 분위기를 표현했다고 전했다. 특히 리히텐슈타인의 표현 방식과 인물의 움직임을 묘사하는 방식은 피카소의 '비치볼을 든 여인 Bather with Beach Ball'의 장난을 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고 밝히기도 했다. 
 

꽝! Whaam! /flickr

리히텐슈타인의 팝아트 초기 작품인 '꽝!' 은 1962년 DC 코믹스에서 따온 것이다. 이 작품은 가장 잘 알려진 팝아트 작품 중 하나이며 로이에게도 가장 중요한 그림 중 하나다. 1963년 뉴욕 카스텔리 갤러리에 처음 전시됐고 1966년 런던 테이트 갤러리가 구입했다. 2006년부터 TATE에서 영구 전시되고 있다. 

왼쪽 모습은 전투기가 로켓을 발사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오른쪽의 모습은 비행기가 포탄에 맞아 불길이 치솟는 것을 볼 수 있다. 리히텐슈타인은 몇몇의 만화책에서 이 이미지를 착안했다. 텍스트 느낌의 '꽝!'은 마치 음향 효과와 비슷한 느낌을 주며 이 작품의 특징이 된다. 비행기 조종사가 적의 비행기를 격추시키고 '꽝!' 이란 의성어와 함께 말풍선 안에는 '난 사격 버튼을 눌렀고.... .....내 앞에 로켓이 하늘을 가로지르며 불타올랐다' 란 대사가 들어 있다. 

만화책의 한 장면을 캔버스에 유화로 옮긴 이 작품은 검은 윤곽선과 강한 원색, 말풍선 등 만화가 갖고 있는 특징을 그대로 가져왔다. '꽝!'은 리히텐슈타인의 전쟁 이미지 시리즈 중 하나로, 강렬한 색과 표현적인 서술이 결합되어 있는 작품이다. 
 

물에 빠진 여자 Drowning Girl /flickr

'물에 빠진 여자'는 1963년 리히텐슈타인이 캔버스에 유화 및 합성 폴리머 페인트로 그린 그림이다. '꽝!'과 더불어 그의 작품 인생에 있어 중요한 작품 중 하나이며, 1971년 MOMA에 인수되었다.

로맨스 만화를 보고 그린 '물에 빠진 소녀'에 등장하는 여인은 눈물을 흘리며 말풍선을 통해 이야기한다. “상관없어. 브래드에게 살려 달라고 전화하느니 차라리 빠져 죽겠어.” 비극적인 결말이 빤히 보이는 것처럼 이 작품에서 등장하는 여인의 모습은 리히텐슈타인이 비극적인 상황에 처한 여성들을 묘사했던 초기 이미지들 중 하나이며, 바다 위 눈물 젖은 여인의 모습을 담고 있다. 

'물에 빠진 여자'는 도움을 청하기보다는 바다에 그대로 쓸려 가고 싶은 것 같은 한 여자를 그린 그림이다. 원본 이미지에는 여자의 남자친구가 전복된 배에 매달려 있는 모습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그림에는 바다와 여자의 머리, 어깨, 손을 제외한 모든 것을 없앴다. 여자의 얼굴은 눈물 범벅으로, 그림을 보는 관람객들은 이 상황 이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 이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전혀 예상할 수가 없다. '브래드'가 누구인지, 왜 전화를 하지 않는지도 알 수가 없다. 

리히텐슈타인은 단순히 만화 페이지를 베끼는 것이 아닌, '물에 빠진 여자'처럼 새롭고 극적인 구성을 만들기 위해 이미지를 잘라 붙이는 기법을 썼다. 또한 만화에 나오는 텍스트를 요약해서 표현해 그림의 중요한 시각적 요소로 사용한 점이 눈에 띈다. 
 

바르셀로나의 머리 The Head of Barcelona /flickr

'바르셀로나의 머리'는 스페인 카탈루냐에서 제작된 초현실주의 조각상으로, 이 조각은 리히텐슈타인이 도자기로 된 타일을 사용한 첫 야외 작품이다. 도시 중심부에 우뚝 서 있는 이 조각은 콘크리트와 세라믹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여성의 머리를 추상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리히텐슈타인은 197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3차원 예술에 대해 별 관심이 없었고, 단지 팝아트에 관심이 쏠려 있었다. 

이 조각은 매우 추상적이긴 하지만, 조각상이 여성의 머리와 얼굴을 닮게 만들어진 것은 분명한 듯 하다. 빨강, 노랑, 파랑, 검은색과 흰색의 모자이크 타일로 덮인 콘크리트 조각은 멀리서 보면 마치 그림 같다. 여성의 눈은 짙은 파란색과 검은색 붓놀림으로 이루어진 것 같고, 입술은 리히텐슈타인이 밝은 빨강 페인트로 휙 칠한 것처럼 보인다. 파란 코와 눈을 가진 1/3의 얼굴은 하얀 타일로 덮여 있으며 오른쪽의 2/3의 얼굴은 리히텐슈타인의 전형적인 팝아트 스타일인 붉은 점으로 덮여 있다. 

리히텐슈타인의 초기 조각들과 '바르셀로나의 머리'가 다른 점이 있다면, 초기 작품들은 페인트칠이 된 알루미늄으로 만들어진 반면 '바르셀로나의 머리'는 콘크리트와 모자이크 타일로 덮인 유일한 작품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모습이 다른 이유는 이 당시 리히텐슈타인이 건축 전반에 세라믹과 모자이크 타일을 사용한 것으로 유명한 건축가인 안토니오 가우디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팝아트 운동의 혁명가였던 로이 리히텐슈타인 

로이 리히텐슈타인 /flickr

로이 리히텐슈타인은 미국 팝 아티스트로서 엄청난 명성을 얻었으며, 팝아트 운동을 이끈 주요 인물 중 하나였다. 그는 자신의 아이에게 미키 마우스의 만화를 그려 주었을 때 예술로서의 회화보다 만화가 더 강렬한 임팩트와 표현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작품에서 사물은 모두 굵은 윤곽선으로, 색은 삼원색을 바탕으로 표현된다. 이 독창성은 기존의 표현 속에 그가 발견해낸 것이지만 진부함, 독창성 부족, 나중에는 그저 카피에 불과하다는 비난까지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영향력과 이미지는 팝아트 하면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아이콘이 되었으며, 그의 명성만큼이나 팔리는 작품의 가격 또한 어마어마함을 알 수 있다. 2012년 5월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거래된 '잠자는 소녀 Sleeping Girl'는 우리나라 돈으로 약 510억에 팔리며 그의 작품 최고가 기록을 세웠다. 

모든 작품들을 통해 격조 있는 예술과 대중 예술은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던 그는 뜻밖에도 "아마도 피카소는 내 그림들을 보다가 집어치웠을 것이다."란 말을 하기도 했다. 과연 그럴까, 피카소가 그의 그림을 봤다면 아주 좋아했을 것 같은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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