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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만난 베를린의 화합의 상징, 브란덴부르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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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만난 베를린의 화합의 상징, 브란덴부르크문
  • 김서진 기자
  • 승인 2021.02.09 17: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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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란덴부르크문 /flickr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독일 베를린의 중심지인 파리저 광장에 가면 엄청난 수의 관광객들과 함께 거대한 건축물 하나를 볼 수 있다. 파리 하면 자연스럽게 에펠탑이 생각나는 것처럼, 독일의 브란덴부르크문은 독일의 분단 시절 동-서 베를린의 경계 지점에 위치해 있었으며, 독일이 통일되며 자연스럽게 독일의 중요한 랜드마크 중 하나가 되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의 명령으로 건축가였던 고트하르트 랑한스가 설계해 3년여 정도 걸려 완공되었다. 

브란덴부크르 문은 존재하는 기간 동안 주요 역사적 사건들이 일어난 장소였고, 오늘날 유럽의 시끄러웠던 역사들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통일과 평화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다. 다만 2차 세계 대전의 여파와 몰려든 사람들로 인해 많이 훼손되었고, 오랜 복원 및 보수 공사를 거쳐 2002년 독일 통일 12주념을 기념해 일반인들에게 개방했다. 현재는 베를린에서 중요한 행사들이 열리는 장소이자, 관광객들에겐 꼭 가봐야 할 장소로 꼽힌다. 


브란덴부르크문의 여정


성문이 건설되기 이전, 1688년의 베를린은 작은 성벽이 있는 도시였다. 평화와 종교적인 관용을 베푸는 정책들을 행한 프로이센 왕국의 지위는 자연스레 도시의 규모를 발전시켰다. 원래 브란덴부르크 문이 있던 자리에는 브란덴부르크문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평범한 성이 있었다. 이 성은 베를린 시내와 외부 사이의 경계에 위치해, 도시 내부에 들어오는 사람들을 감시하고 필요한 경우 세금을 걷기 위해 만든 성이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 /wikimedia commons

이렇듯 평범한 행정 건물이 있던 장소에 문이 세워지게 된 이유는 프로이센의 왕이었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와 관련이 있다. 프리드리히 대왕이라 불리며 절대군주로서 통치를 한 삼촌의 뒤를 이어 왕이 된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즉위 당시 프로이센인들에게 많은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었다. 

이런 기대에 부응하고 싶었던 왕은 거대한 건축물을 세움으로써 자신의 위엄을 증명하고 싶어했다. 그는 평소 자신을 스스로 고대 아테네의 황금기를 가져왔던 페리클레스와 종종 비교했고, 브란덴부르크문은 왕의 이런 심리의 연장선에서 지어지게 된다. 1793년 완성된 브란덴부르크문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가 스스로를 고대의 성군과 비교하고자 하는 마음에 탄생한 것이다.
 

브란덴부르크문 /flickr
프로필레아 /flickr

베를린의 랜드마크로 통하는 이 문은 높이 26m, 폭 65.5m로 6개의 원형 기둥과 그 사이로 5개의 길이 나 있다. 시민들의 통행은 양쪽에서 가장 바깥쪽인 두 통로로만 다니도록 허용되었다. 브란덴부르크문의 디자인은 그리스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로 들어가는 관문인 프로필리어를 기반으로 했으며, 고전주의 역사의 바로크와 네오팔라디안 양식과도 일치하는 부분이 많다. 이 문은 건축가 랑한스에게 '슈프레 강 위의 새로운 아테네'를 만드는 시작과도 같았다. 문 위에는 승리의 여신 빅토리아가 말 네 마리와 함께 이끄는 전차인 쿼드리가가 있으며, 이 쿼드리가는 독일의 조각가인 요한 고트프리트 샤도가 만들었다.

브란덴부르크문은 독일의 역사에 빠질 수 없는 상징과도 같았기에 1806년 프로이센이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패한 후, 베를린에 입성한 나폴레옹이 처음으로 한 일은 브란덴부크르문의 꼭대기에 있는 쿼드리가를 떼내 파리로 옮기는 것이었다. 그러나 옮기는 과정에서 쿼드리가에 손상이 많이 갔기 때문에 파리로 도착한 후 수많은 전문가들이 붙어서 복구를 해야 했다. 
 

쿼드리가 /flickr

이 과정을 거쳐 1808년, 쿼드리가는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었지만 반대로 프로이센인들은 속이 쓰릴 수밖에 없었다. 승리의 여신 빅토리아의 모습을 한 쿼드리가가 베를린을 내려다보던 모습의 브란덴브루크문은 프로이센의 평화와 안정된 사회를 상징하는 것과도 같았지만 이젠 쿼드리가가 사라진 브란덴부르크문을 프로이센인들은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목표는 프랑스에게 뺏긴 쿼드리가를 되찾아 브란덴부르크문을 원상복구해 놓는 것이었다. 

콰드리가를 뻇긴 지 8년 후 1814년, 나폴레옹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프로이센의 장군 게프하르트는 파리에 입성 후 가장 먼저 쿼드리가의 행방을 찾았다. 그는 콰드리가를 사흘만에 찾고 베를린으로 운송을 시작했다. 쿼드리가는 처음 설치되었던 모습 그대로 돌아왔고, 1814년부터 1919년까지 오직 왕족들만이 브란덴부르크문의 중앙 통로를 이용할 수 있었다. 1933년 집권한 나치가 가장 먼저 축하 행진을 한 곳도 이 문이었고, 당의 상징으로 썼을 정도로 브란덴부크르문의 상징성은 대단했다.

이후 제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며 브란덴부르크문도 많은 피해를 입게 되고, 종전 후 독일인들은 문의 복구 작업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 때의 베를린은 분단 상태였고, 하필이면 브란덴부르크문이 베를린의 경계 부분에 위치해 있었다. 문을 복구하기 위해서는 양극단의 진영이 서로 힘을 모아야 했고 1950년대 들어 어쨌든 브란덴부르크문은 복구에 성공하게 된다. 두 세력 사이의 협력이 있긴 했지만 이 문은 곧 분단된 독일 그 자체였다. 
 

1945년, 브란덴브루크문의 풍경 /flickr

1961년, 동독 시민들이 동독을 벗어나 서독에 합류하는 걸 막기 위해 베를린 장벽이 세워졌는데 이 장벽은 또 브란덴부르크문 바로 옆을 지나게 된다. 곧 브란덴부르크문은 동독 군인들만이 지나다닐 수 있는 건물이 되었고, 반대로 서독을 비롯한 서방 진영의 사람들에겐 베를린 장벽 너머로 보이는 브란덴부르크 문이 동독과 공산 진영의 억압이 되었다.

1963년 서독을 방문한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은 서베를린에서 한 연설 중 '나도 베를린입니다'란 유명한 말을 남겼고, 1987년 레이건 대통령은 아예 브란덴부르크문 앞에서 연설을 하며 베를린 장벽을 허물 것을 촉구했으며 결국 독일에도 통일이 찾아온다. 이렇게 브란덴부르크문은 절대주의와 군국주의를 상징하던 건축물에서 통일된 독일을 상징하는 건축물이 되었다. 


브란덴부르크문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

 

쿼드리가 /flickr

쿼드리가는 요한 고트프리트 샤도에 의해 디자인되었다. 라틴어의 quadr-와 jungere를 조합한 단어이다. 원래는 '네 마리의 말이 끄는 전차'를 가리키는 고대 로마의 용어로, 승리의 여신이 이끄는 전차나 마차를 의미한다. 쿼드리가는 고대 올림픽이나 다른 스포츠 대회에서 경주 종목으로 채택되었고, 그리스 신화에서도 신들과 영웅들의 전차로 종종 묘사되었다. 

브란덴부르크문의 콰드리가는 세계 2차 대전 중 사두마차의 네 마리 말 중에 세 마리 말의 머리가 파괴되어, 나머지 온전한 한 마리의 말머리는 베를린의 메르키세 박물관에서 보관 중이며 현재 브란덴부르크문의 콰드리가는 새로 제작해 설치한 것이다. 오늘날 브란덴부르크문의 쿼드리가에는 승리의 여신과 프로이센의 상징인 독수리가 함께 있으며, 여신이 들고 있는 긴 창에는 참나무 잎으로 둘러싸인 십자 깃발과 훈장이 달려 있다. 이외에도 다양한 나라에 쿼드리가를 조각한 상징물이 있는 건축물들을 볼 수 있다. 
 

미국 미네소타주 청사의 쿼드리가 /flickr 
파리 그랑팔레의 쿼드리가 /flickr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는 고대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의 관문의 모습을 본따 브란덴부르크문을 세웠다. 아크로폴리스는 고대 그리스 폴리스의 중심이었던 언덕으로 파르테논 신전 같은 신전과 요새가 구축된 곳이다. 아크로폴리스의 관문이며 정문이었던 프로필리어의 모습은 브란덴부르크문의 모습과 비슷하다. 특히 브란덴부르크문의 거대한 높이의 이 기둥들은 큰 구조물을 지탱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브란덴부르크문 /flickr
파르테논 신전 /flickr

브란덴부르크문의 모습은 고대 그리스인들이 파르테논 신전 등 큰 건축물의 지붕틀을 지지하기 위한 기둥에 기초했는데, 파르테논 신전은 도리스 양식의 건축물 중 가장 유명한 건축물로 꼽히며 4개의 이오니아 양식의 기둥이 서 있는 신전이다. 브란덴브루크문 디자인의 모티브가 된 프로필리어 또한 이오니아 양식과 도리스 양식의 기둥을 혼합해 사용한 것을 특징으로 한다.

이오니아 양식은 소아시아의 에게해 연안에 거주하던 이오니아인 사이에서 발달해 그리스 전역으로 전파된 건축 양식으로, 오리엔트 세계의 영향을 받아 여성적인 경쾌함과 우아함이 특징이다. 날씬한 기둥에 주춧돌을 앉히고 대들보를 부조로 장식하는 등의 예를 볼 수 있다. 그런 면에서 파르테논 신전과 브란덴부르크문, 두 건축물의 모습은 한 시대에 지어졌다 해도 믿을 정도로 닮은 것을 볼 수 있다. 


브란덴부르크문의 시간은 지금도 흘러 문화가 된다 

 

브란덴부르크문 /flickr

브란덴부르크문은 오늘날 베를린에서 가장 상징적인 풍경 중 하나가 되어, 냉전으로 인한 분단을 보여주었고 장벽이 무너진 이후의 통일된 한 나라를 상징하게 되었다. 나폴레옹이 파리로 가져갔던 쿼드리가는 파리가 다시 프로이센에 점령당하기 전까지 창고에 처박혀 있었고 나폴레옹의 패배와 함께 베를린으로 돌아가기까지 오랜 시간이 흘러야 했다. 이후 브란덴부르크문은 또한 동서방의 냉전에 오랫동안 그 경계에서 사람들의 분노와 안타까움을 지켜봐야 하는 입장에 있었다.

브란덴부르크문 주변엔 그동안 엄청나게 많은 역사적인 사건과 변화가 있었지만 그 문만은 아무 말 없이 그대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1791년 세워진 이후 베를린의 기쁨과 슬픔, 온갖 감정을 함께 공유해온 이 문은 사람들이 부여한 온갖 상징과 의미로 점철되었다. 패배의 트로피로 이용되고 냉전의 상징으로만 여겨졌던 브란덴부르크문은 이제 통일과 화합을 뜻하는 중요한 상징이며 독일의 문화 그 자체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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