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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그림에 담고 싶었던 화가, 가쓰시카 호쿠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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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그림에 담고 싶었던 화가, 가쓰시카 호쿠사이
  • 김서진 기자
  • 승인 2021.01.28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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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일본 스미다 구는 도쿄의 23구 중에서도 특히 오래된 전통이 남아 있는 마을 중 하나다. 정치가, 종교가, 예술가 등 많은 위인을 배출했으며, 우키요에(일본 에도시대 서민 계층 사이에서 유행하였던 목판화) 화가인 카츠시카 호쿠사이도 그 중의 한 명이다. 그가 약 70여년에 걸쳐 만들어낸 다채로운 작품은 지금도 더 높은 평가를 받으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예술가들 중 하나로 자리잡고 있다. 

그의 그림은 생전에도 외국에 알려져 있었으며, 그 이름이 광범위하게 알려진 것은 1867년 파리 만국 박람회를 시작으로 자포니즘(일본풍을 선호하는 풍조)이 유행하면서부터였다. 이 박람회에서 수많은 미술 공예품과 함께 우키요에도 함께 소개되었는데, 이 대담한 구도와 밝은 색채의 화풍은 유럽 회화에서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의 그림은 훗날 유럽의 인상파 예술가들에게도 영감을 주게 된다. 

트로카 대로에서 바라본 건설 중인 에펠탑에 눈 내린 모습 /오르세 미술관

호쿠사이가 살아 있던 당시 일본 정부는 외국인의 출입과 시민들의 출국을 막는 고립주의 정책을 시행 중이었다. 하지만 이 정책은 호쿠사이의 작품이 서양 미술사에서도 가장 유명한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주는 것을 막지 못했다. 1850년대, 일본이 국경을 열었을 때 그동안 알음알음 알려져 있었던 호쿠사이의 작품은 대륙을 건너 클로드 모네와 같은 예술가들에게 도달했고, 에드가 드가 또한 호쿠사이의 수천 명의 인간을 그린 스케치에서 영감을 얻었다. 

호쿠사이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화가로는 빈센트 반 고흐와 오귀스트 르누아르 등이 있으며, 앙리 리비에르는 '후가쿠 36경'을 바탕으로 '에펠탑 36경'이라는 판화 시리즈를 제작했다. 아르누보를 대표하는 유리 공예가 에밀 갈레는 '호쿠사이 만가(10,000개의 그림)'에 나오는 잉어를 도안에 넣어 꽃병을 만들었고, 음악가인 클로드 드뷔시는 '후가쿠 36경'의 '가나가와의 거대한 파도'에 영감을 받아 교향시 '바다'를 작곡했다고 한다. 

호쿠사이의 작품은 의상이나 인물에 초점을 맞춘 초상화 스타일에서부터 우키요에 미술 양식을 풍경과 식물, 동물과 결합한 폭넓은 스타일의 예술까지 다양하다. 그는 목판화 외에도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으며, 수백여 가지의 주제를 수천 개의 이미지로 다룬 15권이 넘는 '호쿠사이 만가'를 포함해 책 삽화를 위한 디자인까지 직접 제작했다.
 

토카이도 시나가와의 고텐 언덕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향년 90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그는 그림을 꾸준히 그렸고 자신의 스타일을 확립했다. 총 3만여점이 넘는 그림, 스케치, 목판화, 동화책을 만든 그는 미술 역사상 가장 위대한 거장 중 하나로 남아 있다. 


호쿠사이의 인생과 작품 

 

카츠시카 호쿠사이 /스미다와 호쿠사이 박물관

그는 에도 시대, 1760년 10월 31일 태어났으며 본명은 '카와무라 테츠조우'였지만 어릴 때 이름은 '토키타로'로 불렸다. 5살이 되었을 때 그의 삼촌인, 쇼군(막부의 실권자)의 거울을 제작하는 거울 제작가 나카지마 이세의 양자가 되었으나 그는 호쿠사이를 자신의 후계자로 생각하지 않았다. 호쿠사이는 6살 무렵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아마 삼촌이 만드는 거울 둘레에 디자인이 되어 있는 그림을 보고 배웠던 것으로 추정한다. 

호쿠사이가 13살이 되던 해 삼촌은 그를 책 대본을 파는 가게에서 일하게 했다. 이 곳은 상류층들이 목판화로 만든 책을 읽는 오락 장소로 인기가 꽤 많았던 장소였다. 15살엔 나무 조각가의 견습공으로 일하는 중에 그는 목판화 기술을 틈틈히 익히며 우키요에에 대한 관심을 키워갔다.

그러다 19살이 되고 우키요에의 대가이며 가츠카와 학파의 수장인 가츠카와 순쇼의 제자로 들어가 본격적인 그림 수업을 받게 된다. 1년이 지난 후 호쿠사이의 호는 처음으로 바뀌었고, '슌로' 라는 호칭으로 1779년 가부키 배우들의 사진 시리즈인 첫 인쇄물을 출판한다. 호쿠사이는 이후로도 거의 10년간 순쇼의 작업실에서 일을 했다. 
 

다리를 건너는 농민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1793년 순쇼가 죽고 나서 호쿠사이는 우키요에의 범주를 넘어 다양한 회화 기술을 배우기 위해 여러 화파들을 공부했고, 프랑스와 네덜란드의 동판화를 포함한 유럽풍의 미술품들을 공부했다. 중국화와 서양화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공부를 하며 미술 스타일의 변화를 시도했고 그의 이런 경향은 보수적인 회화계에서 곧 질타를 받게 된다.

1794년, 결국 그는 순쇼의 수제자인 슌코에 의해 가츠카와파로부터 파문을 당하게 되었고, 호쿠사이는 훗날 '나의 예술적 스타일의 발전에 진심으로 동기부여가 되었던 것은, 슌코에게 느꼈던 당혹감'이라 회상한다. 호쿠사이는 우키요에의 전통적인 대상이었던 고급 매춘부와 가부키 배우들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작품의 주제를 여러 계층의 일상 생활과 자연 풍경 등으로 바꾼다. 

이후 호쿠사이는 현재 가장 널리 알려진 '호쿠사이'라는 호로 바꾼다. 이것은 '호쿠사이 타츠마사'의 약칭인 '호쿠사이'를 뜻하며, 북극성 또는 북두칠성을 신격화한 니치렌 불교의 보살 신앙과 관련되어 있다. 그는 이후 "동도각소일람''과 '에도8경'이라는 두 권의 풍경집을 출판한다. 그의 수하에는 학생들이 몰려들기 시작했고 50여명의 학생들이 그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그는 그의 작품과, 자신의 작품을 직접 홍보하는 재능까지 겹쳐 점점 더 유명세를 얻었다.
 

호쿠사이 만가(10,000개의 그림) 중 한컷 /flickr
국화와 벌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호쿠사이는 화려한 그림을 거부하고 풍경에 자신의 감수성과 상상력을 더해 그림에 표현했다. 1811년, 51세의 나이가 됐을 때 호쿠사이는 '다이토'로 호를 바꾸고 그의 가장 유명한 연작 중 하나인, 15권으로 구성된 '호쿠사이 만가'와 각종 소묘집을 제작했다. 이 책은 정교하고 힘찬 붓질로 그려진 드로잉 작품들과 회화들로 구성되어 있다. 상상력을 더한 작품뿐 아니라 사람들의 일상적인 생활 장면도 있으며, 1820년 이전 출판된 그의 그림책은 동물, 종교인, 일반 사람들을 대상으로 그렸다. 

1820년 호쿠사이는 호를 다시 '이이츠'로 바꿨는데, 이는 그가 일본 전역에서 예술가로서의 명성을 얻은 시기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호쿠사이의 전성기는 1820년대였다. 그의 유명한 작품인, '가나가와의 거대한 파도'를 포함한 '후가쿠 36경'은 이 시기에 나온 것이다. 이 작품은 호쿠사이가 나중에 이 시리즈에 10개의 판화를 추가했을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그 외에도 폭포를 둘러보는 모습, 유명한 다리를 놓은 풍경, 양귀비와 닭떼 등 꽃과 새에 대한 세부적인 이미지들도 그렸다. 
 

무사시 지방의 타마 강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그의 대표작인 '후가쿠' 36경'이란, 나중에 추가한 10여점의 그림을 포함해 총 46점에 달하는 우키요에 판화 시리즈이다. 호쿠사이는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로 전국 각지에서 바라본 후지산의 모습을 그렸다. '후가쿠 36경' 안에 그려진 후지산은 햇빛에 산 표면이 붉게 물든 거대한 모습이거나, 뇌운 위 산봉우리만 내민 장엄한 모습이거나, 교각 너머로 아득히 보이는 작은 모습 등의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다. 
 

가나가와의 거대한 파도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그중에서도 '가나가와의 거대한 파도'는 현재의 요코하마 혼모쿠오키의 바다 풍경을 그린 것으로, 그림 앞에는 큰 파도와 파도에 뒤얽힌 배의 모습이 그려져 있고 그 뒤에는 후지산의 모습이 보인다. 다이나믹한 그림 속 대자연의 위협과 파도 앞에 무력한 인간. 그리고 모든 것을 초월한 영산의 모습은 해외에서도 "The Great Wave"란 호칭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스루가 지방의 에지리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후지산은 다양한 모습으로 '후가쿠 36경'에 등장하며, 때로는 중앙이나 어느 날은 배경으로도 나타난다. 호쿠사이는 해가 지평선 너머로 비치는 동안 전역에 깔려 있는 빛을 보여주기 위해 색상을 섬세하게 표현했다. '스루가 지방의 에지리'는 이른 아침, 도카이도 도로 너머 한 줄로 그려진 후지산의 모습을 그리고 있으며, 여행객들이 돌풍에 부딪혀 모자와 종이가 날아가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대영박물관 전시회에도 실렸던 이 그림은 호쿠사이가 표현하는 후지산과, 사라져 가는 일출의 디테일을 보여준다. 
 

카이 지방의 횃불 낚시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호쿠사이의 또 하나의 의미 있는 풍경 시리즈인 '후가쿠 100경'을 제작한 건 1834년 경이다. 이 작품의 후기에 호쿠사이는 '나는 6살부터 사물의 형태를 베껴 그리는 열정을 가졌고, 50세 때부터 많은 그림을 발표했지만 무엇보다도 70세까지는 고려할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을 그렸다. 73세에 나는 동물, 새, 곤충과 물고기의 구조, 식물의 삶을 부분적으로 이해했다. 그러므로 86세에 나는 더 나아가야 한다. 90세에 나는 그들의 비밀을 더 깊이 알게 되고, 100세가 되면 되면 아마도 실로 경이롭고 놀라운 고지에 도달했을 것이다. 내가 101세가 되면 각각의 점과 선은 그 나름의 삶을 갖게 될 것이다'고 적었다.

1839년, 호쿠사이 작업실에 화재가 나 그의 작품 대부분이 소실되는 안타까운 일이 발생한다. 이 무렵은 안도 히로시게 등의 젊은 예술가들이 인기를 끌며 호쿠사이의 인기 또한 쇠락하는 시기였다. 하지만 호쿠사이는 그림 그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90세의 장수를 다 하고, 평생 현역으로 많은 제자를 책임졌으며, 인기 화가의 명성을 누렸음에도 그는 임종 직전까지 "앞으로 5년, 아니, 앞으로 10년만 더 살 수 있다면 진짜 그림쟁이가 될 수 있을 텐데..." 라고 되뇌이며 현재에도 만족하지 않은 채 항상 더 높은 곳을 추구했다고 한다. 
 

고이시가와의 아침 설경 /flickr

호쿠사이는 가지고 있던 호만 30여개가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당시의 일본 화가들이 여러 가지 호를 갖고 있는 것은 일반적인 관행이었지만 호쿠사이는 그중에서도 유독 호의 수가 많았던 괴짜였다. 

호쿠사이는 이름만큼 자주 바꿨던 것이 사는 곳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는 살면서도 청소를 전혀 하지 않았고, 주변이 어질러진 만큼 어질러지면 곧 이사를 갔다고 한다. 살면서 93번이나 이사를 했다고 하며, 대부분은 태어나고 자란 스미다구 곳곳으로 이사를 다녔다. 마지막으로 머문 집은 호쿠사이가 얼마나 지저분하게 놔두었는지 오랫동안 임차인이 없었다고 한다. 요리도 전혀 하지 않았으며 사온 음식은 용기에 옮기지 않고 그대로 먹었으며 먹고 나면 그냥 그 주변에 버렸다고. 
 

토카이도 카나야의 후지산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이렇듯 호쿠사이에 대해 여러 에피소드가 전해져 오는 것을 보면 괴짜 타입에 붙임성이 좋은 편도 아니었고, 일반적인 의식주에도 거의 흥미가 없어 보인다. 당시 인명록에 실린 호쿠사이의 주소란은 '부정(정해지지 않음)'이라 써 있었다고 한다.

아마 호쿠사이는 외곬수처럼 그림을 그리는 것 이외에는 사람과 물건에 철저히 무관심했던 것일 테다. 그림을 그리는 것이 최우선이었던 호쿠사이에게 집은 생활보다 그림을 그리기 위한 장소였을 것이다. 특별한 건 그가 군것질을 좋아했다는 것이다. 그의 집에 손님이 방문할 때 들고 갔던 선물로 과자를 그렇게 좋아했다고 하니 말이다.  


호쿠사이와 서양 예술가들

 

카이 지방의 가이카자와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14세기 중반부터 16세기에 걸쳐,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기를 대표하는 예술가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그림, 조각, 건축, 음악이라는 예술 분야는 물론이고 과학과 수학, 공학, 해부학, 지구학, 식물학이라는 장르에도 재능을 발휘한 그야말로 천재 중 천재이다. 다빈치는 자신의 과학적, 다각적인 지식과 견지는 자연과 공생하며 자연 그 자체에서 배웠다고 말한다. 

다빈치의 발언 중 ”그림이야말로 최고의 예술“이란 말에, 동시대의 위대한 조각가 미켈란젤로는 그 말에 분개하여 다빈치에 따지고 들자 다빈치는 ”당신에게 공기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이지만 나는 공기를 그릴 수 있다“고 반박했다. 과학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던 다빈치는 먼 산이 푸르게 보이는 것은 수증기 층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공기를 그린다는 의미를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공기 원근법'이라는 화법을 만들어내 그림이야말로 최고라는 자신의 말을 뒷받침할 수 있었다.

호쿠사이도 마찬가지로, 다빈치와 같이 항상 자연에 시선을 두었다. 풍경을 정확히 표현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 화가 중 한 명이었던 호쿠사이는 자연과 인간이 싸우고 있다는 관점을 적용한 '가나가와의 거대한 파도'의 큰 파도를 시작으로 바람과 물의 움직임까지 디테일하게 그림으로서 표현할 수 있었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낙수장'의 정원 /intojapanwaraku

미국의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가 만든 역사적인 작품인 '낙수장'에는 비화가 있다. '낙수장'은 미국 피츠버그에서 한 백화점의 오너였던 카우프만을 위해 설계한 저택의 별칭으로, 저택 내부에서 기세좋게 떨어지는 폭포수를 말한다. 울창한 자연에 어울리는 별장을 원했던 카우프만의 주문을 받고 라이트가 만든 설계도는 폭포 위에 세워져 있는 저택이었다.

설계도를 본 카우프만은 폭포 위가 아닌, 폭포를 보면서 살고 싶다고 라이트에게 요구한다. 라이트는 그 말에 '폭포와 그 폭포를 둘러싼 자연과 일체가 되어 생활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이 집을 설계했다'고 답한다. 그리고 그가 천천히 끄집어낸 한 장의 그림은 호쿠사이의 '지역의 폭포들' 연작 중, 기소가도 뒤편의 아미타 폭포였다.
 

지역의 폭포들 연작 中 /intojapanwaraku

폭포에서 떨어져 흐르는 물을 유니크하게 표현해낸 그림을 바라보던 카우프만에게 라이트는 사람과 자연의 공생을 이야기했고, 곧 카우프만을 납득시켰다고 한다. 근대 건축 역사에 업적을 남긴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고, 그 해외의 건물이 역사적 건축물로써 지금도 이름을 떨치고 있다는 것을 호쿠사이는 알고 있을까.


그림만을 위해 살았던 카츠시카 호쿠사이 

 

에도의 니혼바시 다리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호쿠사이가 세상을 떠난 후 그 이름은 유럽으로 전해졌다. 참신한 작품은 고흐와 모네, 드가라는 인상파 화가를 감동시켰고, 19세기 서양을 지배했던 “자포니즘”에 미친 영향은 매우 컸다. 미국의 “LIFE”지가 낸 "1000년간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세계의 100인”이라는 특집에서 일본인으로서 뽑힌 유일한 사람이 호쿠사이기도 하다. 

약 70여년 동안 그림에 정진하며 수많은 작품을 남긴 호쿠사이는, 언뜻 보면 한 사람의 화가가 그렸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화풍이 다양했다. 순쇼의 제자가 되어 슌로라 칭했던 호쿠사이는 슌로의 시기가 끝날 무렵 이미 우키요에뿐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회화를 습득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가츠카와파를 떠나 전혀 다른 장식화 양식의 일파인 '소우리'파를 따라 '소우리'라는 호를 나중에 떼낸 후에는 천지, 우주, 자연을 스승 삼아 그림을 그려갔다. 이 경험들은 호쿠사이의 화풍을 풍부하게 만들었다. 
 

아라시야마의 토게츠 거리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한결같이 화가의 길을 계속 추구해온 호쿠사이는 죽기 전, 자신이 죽은 뒤 영혼이라도 되어 여름 들판에 한가롭게 날아가 보자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나이가 들었어도 끓는 의욕으로 더 새로운 세계에 도전하며 임종 무렵까지 그림붓을 쥐고 놓지 않았던 그였다.

그의 화가 인생은 1849년 조용히 막을 내렸지만 거의 광적으로 그림에 열광했던 그의 모습과 수많은 작품들은 서양의 예술가들에게 다양한 영감을 주어 더 위대한 작품들을 세상에 태어나게 했다. 호쿠사이는 90세 정도까지 세상에 존재했지만, 그의 예술 세계와 작품들은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며 진정한 불멸을 이룬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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