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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몰랐던 한복이야기] 성균관 유생들의 교복, 청금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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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몰랐던 한복이야기] 성균관 유생들의 교복, 청금복
  • 윤미지 기자
  • 승인 2021.01.26 10: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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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에도 교복을 입었을까

[핸드메이커 윤미지 기자] 교복은 학창 시절 한 번쯤 입었거나, 입고 싶었던 옷이다. 각 학교의 상징과도 같은 교복은 그 문화와 역사가 깊다. 교복은 시대 흐름에 따라서 ‘존재할 것이냐, 폐지될 것이냐’의 여러 가지 논의 과정을 거치며 지금의 모습까지 왔다. 현재는 국내에서 소수의 사립초등학교 그리고 일반 중·고등학생 등이 교복을  입고 등교한다.

교복은 10대의 전유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이후부터 1980년대 초까지는 대학생의 교복도 존재했었다. 흔히 학생복이라는 이미지가 강한 교복을 10대를 지나 대학생도 착용했다는 점이 흥미롭다. 물론 형식적으로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 교복을 입었던 것으로, 대학생의 교복 착용 자체가 강요되는 사회적 분위기는 아니었다고 전해진다.

1983년 문교부에 의해서 중·고등학생 교복 자율화가 시행됨에 따라 대학생 교복도 사라지게 된다. 교복 자율화가 시행된 이유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으나 대표적으로는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는 것에 목표가 있었고 그 외에도 청소년의 개성 발달을 존중하는 의미도 담고 있었다.
 

자켓과 조끼, 스커트로 구성 되어 있는 현대 교복 /국립제주박물관
자켓과 조끼, 스커트로 구성 되어 있는 현대 교복 /국립제주박물관

교복은 시간이 흐르고 1986년 이후에 부활한다. 이때는 학교장 재량으로 사복을 입거나 교복을 입을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이 눈에 띈다. 현재는 대부분 중·고등학생이 교복을 흔하게 입으며 단일화된 복장에 의해 여러 가지 고충도 겪게 되지만 그로 인해 학창 시절의 추억으로 손꼽는 일이 많다.

한국 교복 역사 중 최초의 교복에 관한 이야기는 의견이 다양하다. 1886년 설립된 한국 최초의 여학교 이화학당의 교복을 그 시초로 보는 의견도 있으며 배재학당에서 1898년에 착용했던 교복을 최초라고 여기는 관점도 존재한다.

현대의 교복은 양장 디자인을 보통으로 하지만 이화학당에서는 치마저고리를, 배재학당에서는 도포 차림의 교복을 입었다고 전해진다. 도포는 조선 시대 역사에서 임금과 사대부의 외출복을 일컬으며 또한 과거를 보는 선비, 유생들이 관례, 혼례 등에 입었던 의례복이기도 하다.
 

1918 이화학당 대학부 졸업 사진 /여성교육가 김활란
1918 이화학당 대학부 졸업 사진 /여성교육가 김활란

이 두 가지 예시 모두 한반도 최초의 교복으로 소개되지만 사실 조선 시대에도 교복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더욱이 이 교복은 현대에도 그 전통이 이어져 내려오고 있어 흥미를 더한다. 한민족 역사에서 법으로 규정한 최초의 교복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조선 최고의 인재 교육 공간, 성균관

성균관의 역사는 고려 말 충선왕 때 지어진 최초의 교육기관이던 국학을 개칭하여 조선까지 이어졌다. 성균관은 조선 최고의 국립교육 기관으로 미래의 관리가 될 이들을 교육하는 곳이다.

현대에는 성균관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명륜동에 있는 4년제 사립대학교를 주로 생각한다. 이 대학 내에 조선 시대 최고 교육기관이었던 성균관이 위치하는데, 그 안에 존재하는 명륜당이라는 건물의 이름에서 지역 이름이 정해진 것이다. 명륜당은 ‘윤리를 밝히는 집’이라는 뜻이며 이 강당에서 고려 시대 말기부터 조선 시대까지 유학을 가르쳤다고 한다.
 

명륜당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명륜당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이 외에도 성균관의 건물 구성으로는 도서관을 뜻하는 존경각과 사대부가 익혀야 할 6가지 중의 하나인 ‘활쏘기’에 필요한 활과 화살을 보관하는 육일각도 존재한다. 또한 동재와 서재는 성균관 유생들이 기숙사로 쓰던 건물이다. 성균관에 들어가 유학을 배우기 위해서는 먼저 소과에 합격해야 했다. 소과에 합격한 과거 지망생들은 성균관에 입학하여 숙식하면서 대과를 준비한 것이다. 이때 기거했던 건물이 바로 동재와 서재다. 조선 시대의 과거 시험 장소 중 하나인 비천당 역시 성균관 내부에 있다.
 

서울종로 성균관 존경각 측면 서울종로 성균관 존경각 측면 /국립중앙박물관
서울종로 성균관 존경각 측면 서울종로 성균관 존경각 측면 /국립중앙박물관

사실 성균관은 우리가 아는 것과는 다르게 단순히 교육만이 이뤄지던 곳은 아니었다. 유학에 대해 공헌한 선현의 제사를 받드는 역할 역시 성균관의 주요한 기능이었으며 이는 성균관 건축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전묘후학前廟後學의 전통 방식을 따라 앞쪽에서는 선현의 제사를 위한 향사 공간이 마련되었으며 그 뒤로 다양한 교육 공간이 자리잡았다.

이처럼 성균관은 단순히 유생의 수학만을 위하거나 관리를 양성하는 기능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 성균관이 국가적으로 주요한 기관에 해당했다는 것은 여러 기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성균관은 조정의 부당한 처사에 대해서 대외적인 시정을 요구하기도 했으며 이때는 재회(유생들의 자치기구)를 열어 소두를 뽑고 유소儒疏를 올리기도 했다.

또한 유생들은 시정 사항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때 집단으로 시위하는 소행을 행하기도 했으며 수업 거부나 단식투쟁, 공관 등의 실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조선 최고의 인재들이 모여 있었으니 어찌 보면 성균관의 위세가 대단했다고 느껴진다.


성균관 유생의 교복, 청금복

조선 최고 인재들이 모여 있는 성균관에 관한 기록은 여러 문헌을 통해 쉽게 관찰할 수 있다. 또한 이에 수학했던 유생들의 생활을 기록한 글도 역시 많다.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와 서재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 하나 있는데 바로 북이다. 이 북을 한 번 치면 침상에서 일어나야 하며, 두 번은 외관을 정제하고 글을 읽었다. 세 번은 진사식당에 모여 식사하라는 뜻이라고 한다.

유생들은 성균관에서 생활하며 ‘청금복’이라는 의복을 통해 정제를 갖춘다. 이 청금복이 조선 역사상 법으로 규정한 최고의 교복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성종 8년, 조선의 법전인 경국대전에서는 ‘성균관 유생은 청금단령을 입는다’라고 규정한다. 청금복은 성균관 유생들의 고유한 의복 문화였다.
 

유생복 /Encyves Wiki
유생복 /Encyves Wiki

흔히 청금복이라 하면 푸른색 옷이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으나 이에는 또 다른 의미가 존재한다. 청금은 푸른색 유복이라는 의미 외에도 ‘유생’ 자체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된다. 중국 시경의 한 구절에서 ‘청청자금, 유유아심’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청금은 여기서 차용되어 정립된 이름이다. ‘푸르고 푸른 임의 옷깃, 기나긴 것은 이내 마음이로다’라는 구절에서 청금은 유생을 의미한다고 알려진다.

유생의 고유 복장인 ‘청금복’의 시초는 조선 태종 11년에서 찾아볼 수 있다. 태종실록에 의하면 성균관 및 5부 유생에게 조정의 제도에 의해 청금 착용이 내려졌다고 한다. 처음 청금복은 ‘청금난삼’을 의미했으며 옥색포견에 흑연을 두른 유복을 뜻했다.

조선 역대 왕들은 유생의 의복인 청금복의 복식제도에 관해서 관심이 많았다. 조선 시대 성종 때는 ‘청금단령’이라고 하여 깃을 둥글게 만든 의복으로 변화하게 됐다. 청금은 앞서 말했듯 단지 푸른색의 의복을 뜻하는 단어는 아니었으며 이때 단령은 그 색깔이 다양했다고 알려진다. 특히 명종 때는 청색 옷에 검은색 금을 단 유복을 입었다고 알려졌으며 선조 때는 다시 태종 때와 유사한 의복을 입었을 것이라 추측한다.

임진왜란이 발발했던 1592년, 조선은 최대 위기를 맞으며 국가의 기강이 흔들린다. 성균관 유생의 의복 문화 역시 무질서해지며 왜란 이후에는 유생들이 각자의 사정에 맞게 유복을 차려 입고 다니기 시작했다. 정해진 틀 없이 착용되던 유복의 모습은 영조에 의해 대대적으로 재정비되었다. 우리가 흔히 자식을 죽인 아버지로 알고 있던 영조는 사도세자가 성균관에 입학할 당시엔 누구보다 자식에 대한 애정을 품고 있었으며 이에 성균관의 무질서했던 유복 역시 재정비에 나선다. 이때 유생들은 식당 또는 기숙사에 가거나 학생회 활동에 참여하는 등의 비교적 경한 일에는 홍단령을 입게 되었으며 성균관의 공식 행사나 제례가 있는 경우에는 청청자금의 청단령을 착용하도록 했다. 그 외에도 임금을 알현하는 국가적 행사나 중대한 사안이 있는 때에는 검은색의 흑단령을 입도록 했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다양한 모습을 보였던 청금복은 그 의미 역시 굉장히 중요하다. 유생에게 있어서 가장 중시했던 ‘예’를 갖추는 방법은 의관을 바르게 하는 것에서도 그 가치를 찾을 수 있었다. 청금복은 ‘의례성’을 담고 있는 의복으로 조선의 역대 왕들이 성균관 유생의 복식제도를 정리하고 이를 엄격하게 관리했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왕세자 입학례에 ‘배우는 사람으로서의 예법’이 나타난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왕세자가 성균관에 입학할 때 유건에 학생복을 갖춰 입는다는 내용이다. 유복은 신분을 구별하지 않고 배움을 찾는 데에 있어 누구든 갖춰 입어야 하는 예법에 해당했다.
 

유생들이 실내에서 쓰는 두건, 유건儒巾 /국립민속박물관
유생들이 실내에서 쓰는 두건, 유건儒巾 /국립민속박물관
유생들이 실내에서 쓰는 두건, 유건儒巾 /국립민속박물관
유생들이 실내에서 쓰는 두건, 유건儒巾 /국립민속박물관

청금복은 조선 시대 신분 계층의 세습된 모습을 강조하지 않고 소박한 품격을 들어내는 의관이라는 것에서도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관리를 양성하는 기관이었던 성균관은 성리학의 이론적 토대인 ‘수기치인’을 기본 이념으로 두고 학문을 수학했다. 나를 먼저 수양한 후에 남을 교화해야 한다는 의미로 검약과 절제를 미덕으로 삼았으며 의복에서도 그 ‘청빈성’이 드러났다.

성균관의 유생들은 청금을 입음으로써 유생의 도리를 지키고자 자신을 연단했다. 청금은 곧 유생의 도리이자 상징으로 이를 입는다는 것은 그 지위에 걸맞은 언행을 보여야 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조선 시대 다양한 기록에서 청금복이 지닌 ‘지위 상징성’을 발견할 수 있으며 조선 제9대 왕 성종 재위 간의 기록 중에도 ‘유생은 마땅히 그 복식을 다르게 해야 한다’라는 청금복의 대한 내용이 있다. 또한 조선 정조 5년에 왕명에 따라 펴낸 영조 재위 동안의 기록에서는 ‘유건을 쓰고 유복을 입으면서’라는 글귀를 발견 가능하다. 유복을 입었다면 그에 맞는 행동을 보여야 한다는 의미를 유추할 수 있다.
 

유건을 쓴 유생들이 모여 그림을 구경하는 풍속도. 김홍도필 풍속도 화첩(金弘道筆_風俗圖_畵帖) '그림감상'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유건을 쓴 유생들이 모여 그림을 구경하는 풍속도. 김홍도필 풍속도 화첩(金弘道筆_風俗圖_畵帖) '그림감상'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성균관 유생이 입는 의복은 조선 시대 일반적인 선비의 유복과는 확실한 차이를 두고 있었다. 그만큼 청금복을 입는다는 것은 지위와 신분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유생들의 고유한 의복 문화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대에도 만나볼 수 있는 청금복

조선 시대에 입었던 한반도 최초의 교복 청금복은 현대에도 그 착용 모습을 볼 수 있다. 성균관대학교에서는 본교에 큰 행사가 진행되면 공자사당을 찾아 이를 고하는 의식을 치른다. 신입생 입학을 고하는 고유례를 지내며 청금복을 착용하는데 이때 예를 갖춰 푸른색의 유복을 입고 머리 위에 유건을 쓴다.

성균관대학교 학생이 청금복을 착용할 기회는 또 있다. ‘청랑’은 성균관 유생 문화를 계승하여 대학 문화를 이끌어 가는 본교 학생 활동 단체다. 청랑에서는 ‘신방례’, ‘고하노라’ 등의 행사를 매년 주관하며 이 청금복을 착용한다.

실제 조선 시대 진사·생원시 합격생을 대상으로 성균관 유생이 주도한 일종의 통과 의례로서 신방례가 존재했다. 조선왕조실록에 접방례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때도 공식적인 행사는 아니었으나 유생들 사이에서는 전통적으로 치러지던 관례였다. 청랑에서 주도하는 신방례는 이를 닮아있다. 이 외에도 ‘고하노라’라는 과거 성균관 유생들이 임금에게 바치던 상소인 유소 문화를 계승한 행사가 있다.
 

청금복을 입은 청랑 단원들의 모습 /청랑
청금복을 입은 청랑 단원의 모습 /청랑
청금복을 입은 청랑 단원의 모습 /청랑

청랑에서 주도하는 행사에서 착용하는 청금복은 전통 고유의 디자인과는 조금 다른 모습을 보인다. 도포와 쾌자는 원형 한복의 디자인을 그대로 가져오되 입고 벗기 간편한 모습으로 실용적 리뉴얼을 거쳤다. 특히 허리 부분에 묶는 사대의 디자인이 크게 달라졌으며 전통적 모습과는 차이점이 있다.

청랑의 리디자인된 청금복 사대의 형태는 평평하고 넓은 모습으로 색은 흑색과 백색으로 이뤄져 있다. 본교의 청랑 회장에 따르면 이는 2010년 KBS2에서 방영한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 속 유복의 모습에서 차용해 디자인했다고 한다.
 

청금복은 그 모습에서 성균관 유생의 시간이 학문 수양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청빈하게 유지하고 스스로 신분의 도리를 다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과거 성균관의 교복이었던 청금복은 유생이라면 갖춰야 할 도리를 표하는 의복으로 존재했기에 그 의미가 더 남다르다고 느껴진다.

현대에만 입을 것 같았던 교복의 역사는 의외로 조선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청금복을 통해 과거 성균관 유생의 모습을 돌아볼 수 있으며 이는 한반도 최초의 교복이 가진 의미를 다시금 새겨볼 기회로 여겨진다.


자료 제공 : 성균관대학교 학생활동 단체 ‘청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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