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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로 남은 도시가 주는 웅장함, 터키의 고대도시 에페소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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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로 남은 도시가 주는 웅장함, 터키의 고대도시 에페소스
  • 김서진 기자
  • 승인 2021.01.2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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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페소스 /flickr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에페소스는 터키의 에게 해 연안(소아시아 서쪽 연안)에 위치한, 그리스 아테네에 의해 BC 9세기에 건립된 고대 도시이다. BC 11세기 말부터 이오니아의 식민도시가 되어 초기 그리스 문화가 발달했고 BC 6세기부터 페르시아에게 점령당했다.

BC 334년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해방되어 헬레니즘 문화, 로마 문화가 번영했으며, 여러 건축물이 세워졌고 그중에서도 여신 아르테미스를 모신 신전이 특히 유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신전은 몇번이고 중건되었다가 BC 4세기에 이르러서는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힐 정도의 대규모로 완성되었으나 영광스러웠던 그 모습은 현재 폐허만 남아 있는 상태다.

로마 제국 시대 항구도시기도 했던 에페소스는 소아시아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았고, 부유한 도시이자 중요한 상업 중심지 중의 하나였다. 항구는 곡물을 교환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커다란 체육관과 목욕탕, 창고, 길고 좁은 건물들이 늘어서 있었고 도시의 중심에는 25.000여석 규모의 극장, 상업용 시장, 도서관, 로마 총독의 시청 건물도 있었다. 

메리예마나 /flickr

문화적, 상업적 도시의 문명을 누렸던 에페소스는 기독교 초기 역사에서도 중요한 도시로 알려져 있다. 기독교의 초석을 세운 사도 바울이 교회를 세운 곳이기 때문이다. 에페소스에서 5㎞ 정도 떨어진 곳에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사도 요한의 보살핌을 받으며 말년을 보냈다는 '메리예마나' 라 불리는 집이 있다.

마리아의 죽음 이후 요한은 밧모섬에서 마지막 삶을 보내며 계시록을 집필했다고 한다. 이렇듯 에페소스는 그리스와 로마, 기독교의 문화가 적절히 융합되어 있는 문명의 보고라 불린다. 그리고, 201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에페소스의 흥망과 성쇠 

에페소스의 길거리 /flickr

에페소스는 학문의 중심지이자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인 헤라클리토스의 출생지였고 본거지였다. 여성은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누릴 수 있었고, 여성 예술가와 조각가, 화가, 교사들이 있었다는 기록도 전해져 온다. 밤이 되면 도시의 온 거리는 램프가 밝힌 불로 밝게 빛났고, 리디아의 왕 크로수스의 통치 하에 고대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아르테미스 신전의 건설도 이 즈음 시작되었다.

크로수스는 이후 페르시아 왕 키루스의 침략에 패해 소아시아 전체가 페르시아의 지배 하에 놓였지만, 에페소스는 항구 도시로서의 역할을 계속했다. BC 5세기 이오니아의 도시 국가들이 페르시아의 지배에 반기를 들었을 때에도 에페소스는 별다른 저항을 하지 않았고, 덕분에 페르시아인들에 의해 도시가 파괴되는 것을 면할 수 있었다.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 해방될 때까지 에페소스는 페르시아의 지배 하에 있었다. 에페소스에 온 알렉산더가 아르테미스 신전의 건설이 아직 완료되지 않은 것을 보고, 그는 자신의 이름으로 이 신전을 지어서 기부하기로 하고 건립의 비용 전액을 내놓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에페소스인들은 "어떤 신의 이름으로도 다른 신의 신전을 짓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대왕의 제의를 완곡하게 거절했다고 한다.

조각으로 남아 있는 에페소스의 흔적 /flickr

이후 BC 86년, 로마의 지배에 들어선 에페소스는 아우구스투스 통치 하에서 로마령 아시아 속주의 제 1도시가 된다. 지리학자 스트라보는 이때 에페소스가 중요한 상업 중심지였다고 기록한다. 오랜 기간에 걸쳐 화려하면서도 실용적인 건물들이 세워지고, 이 건물들로 인해 에페소스는 그리스 영토에서 가장 대표적인 도시로 뽑히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기독교가 전파되기 시작했고, 후에 기독교도가 이 지역을 지배하게 된 이후 에페소스는 문화와 지적 수준의 후퇴를 겪게 된다.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모든 신전과 학교를 폐쇄했고, 여성들은 2등 시민으로 떨어졌으며 여성들이 남성들을 가르치거나 독립적으로 일하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여신 아르테미스에 대한 숭배는 금지되었고, 아르테미스 신전은 과격한 기독교도인들에게 파괴되어 교회와 같은 다른 건물을 건설하는 데 쓰는 채석장으로 전락했다. 한때 램프로 환하게 밝혀졌던 거리는 '세상의 빛' 이라 일컬어진 기독교로 향해 부패와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AD 263년, 고트족에 파괴당한 도시와 신전은 옛 영광을 회복하지 못하고 스러졌다. 과거의 영화를 품은 채 현재는 그 당시 떠나버린 시민들 대신 현대의 관광객들이 남아 에페소스를 찾고 있다.  


에페소스의 유적지들 

에페소스는 고대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였고, 현재 터키에서 가장 인기 있는 관광지 중 하나다. BC 6세기에 지어졌고 융숭한 규모를 자랑했지만 이제는 터만 남은 에페소스에서 주목할 만한 유적지들은 꽤 다양하다.

헤라클레스의 문 /flickr
크레티아 거리 /flickr

헤라클레스의 문과 크레티아 거리 

크레티아 거리의 끝엔 양쪽 기둥에 헤라클레스 상이 있는 개선문이 있다. 일명 '승리의 문'으로 헤라클레스는 그리스 신화에서 힘과 용기, 지혜를 상징한다. 이 문은 귀족들만 들어갈 수 있었던 문으로 위쪽은 상류층이 사는 곳, 아래쪽은 평민들이 사는 곳으로 구분되었다. 돌기둥으로 지어진 '헤라클레스의 문'은 6개의 기둥 중 현재는 2개만이 남아 있다. 헤라클레스의 상징인 사자의 가죽을 지닌 모습이 부조로 남아 있고, 줄지어 선 열주들 위로 지붕이 있었다고 한다.

헤라클레스의 문으로부터 켈수스 도서관까지의 거리는 크레티아 거리(사제들의 거리)라 부른다. 로마 제국 시절 종교와 도시 행사를 관장하는 사제, 또는 승려를 크레티아라 불렀는데 이 이름이 새겨진 대리석 기둥의 기반부가 이 길에서 발견되어 크레티아 거리라 부른다. 내리막 거리에는 대리석이 깔려 있고 상점과 갤러리들, 많은 조각상들이 서 있었다고 한다.

도로의 양쪽에는 화랑들이 있었고 화랑 뒤쪽으로는 가게들과 개인 주택들이 많았다. 서 있는 기둥들 앞쪽에는 에페소스의 영웅이나 유공자들의 동상이 줄지어 서 있었고, 동상들의 받침대에는 동상의 인물에 관해 설명하는 글들이 있었다.
 

히드리아누스 신전 /flickr
공중 화장실 /flickr

히드리아누스 신전과 공중 화장실 

히드리아누스 신전 위 아치에는 아폴로 신, 아테네 여신, 헤라클레스 등이 새겨져 있고 진품은 에페소스 박물관에서 전시 중이다. AD(이후 AD생략) 128년 에페소스를 방문한 히드리아누스 황제를 기념하기 위해 138년 퀸틸리우스에 의해 건립된 코린트 양식의 신전이다. 주변으로는 스콜라스티카의 목욕장과 공중 화장실 등 당시의 삶과 흔적들,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특이한 건 신전 근처에 있었던 공중 유료 화장실(latrina)인데, 한번에 50명까지 들어갈 수 있었고 깨끗한 물이 흘러나오는 위쪽은 상대적으로 가격이 더 비쌌다. 당시 사람들은 '키톤'이라는 긴 옷을 입고 다녔고 볼일을 보면서도 몸을 가릴 수 있어 딱히 변기 사이에 칸막이가 없었을 것이라는 설이 있다. 

용변기 앞에는 수로가 흘러 볼일 후 몸을 숙여 손을 씻을 수 있었고 변기 아래에도 물이 흘러 일종의 수세식 화장실의 시초라 여겨진다. 여자 화장실은 따로 지붕을 설치했고 남자만이 사용하는 유료 화장실은 볼일을 보는 동안 악사들이 연주도 해 주었다고 한다. 

조그마한 아고라 터 /flickr
상업 시장이었던 아고라 터, 참고로 에페소스에는 고양이들이 많다 /flickr

아고라

아고라는 각지에서 배로 싣고 온 물건들을 사고파는 국제 시장 역할을 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통치 기간인 1세기에 건립되었고 테오도시우스 황제 때 마지막으로 개축되었다. 물건을 사고팔던 곳이었을 뿐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 만나 환담을 나누던 만남의 장소이기도 하다. 도시에서 주관하는 모임이나 행사를 치렀던 곳으로도 쓰였고 4세기에는 공동묘지로 사용되기도 했다.

아고라는 작은 터와 커다란 상업적 시장으로 쓰인 큰 아고라로 나뉜다. 큰 아고라에서는 주로 청동 제품, 도자기, 아라비아에서 온 향료들과 약용 식물, 보석, 비단 등이 거래되었다. 로마의 집정관이었던 안토니우스와 이집트의 클레오파트라도 이 곳을 자주 다녀갔다고 한다. 아고라로 통하는 길은 에페소스 항구로 이어지는 항구 대로와 연결되어 있다.
 

폴리오 샘 /flickr
도미티아누스 광장 /dgar Serrano

도미티아누스 광장

두 번째 사진의 왼쪽은 에페소스 사람들이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아버지인 베스파시우스 신을 모셔 놓은 신전이고, 오른쪽 끝의 아치는 에페소스에서 가장 큰 샘이었던 폴리오 샘의 아치이다. 

큰 아치에는 폴리오라는 글씨가 씌어 있어 폴리오 샘이라고 부른다. 에페소스의 부자였던 가이우스 폴리오라는 사람이 건축한 이 샘은 42㎞의 쿠샤다스, 15㎞의 참륵마을, 20㎞의 케이스터 강, 이 세 곳의 수로에서 물을 끌어와 토관을 통해 도시에 물을 공급했다. 폴리오를 기리기 위해 그의 양자가 바로 옆에 6.4미터 높이의 받침돌 위에 석관이 있는 기념관을 건립했다고 한다.
 

프리타네이온 /flickr

프리타네이온

에페소스 도시의 행정 기관, 시청이 있었던 곳으로 회의가 열리고 손님을 접견하던 장소이다. 도미티아누스 광장에서 위쪽으로 올라가는 길에 있다. 기원전 BC 3세기경 세워지고 아우구스투스 황제 시절에 완성되었다. 시청 옆에는 아르테미스 여신상이 서 있었고, 그 위쪽에는 에페소스의 번영을 상징하는 성화가 1년 내내 타고 있었다고 한다. 그 뒤에는 시청에서 일하는 관리들의 집들도 있었다.

에페소스의 번영을 나타내는 영원의 성화는 가정의 수호신이자 불의 여신인 헤스티아의 불을 뜻하며, 이 성화는 1년 내내 밤낮없이 불타올랐다. 귀족이나 부유한 집안 출신의 프리탄은 도시에서 종교적으로나 행정적으로 가장 높은 지위로, 이들의 주요 임무는 프리타네이온에 있던 성화 불꽃을 꺼지지 않게 지키는 것이었다. 
 

오데온 /flickr
대극장 /flickr

오데온과 대극장

오데온은 2세기에 세워진 원형 극장으로, 시를 낭송하거나 음악회를 개최했던 장소다. 150여년 경 이 도시의 귀족인 푸블리우스 베디우스와 그의 아내 플라비아 파피아나에 의해 세워졌다는 사실이 발굴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그밖에도 의회 회의를 하거나 오케스트라도 열리는 장소였으며, 약 1500여명 정도 수용 가능했다.

지붕이 있는 극장형으로 세워진 문화의 장소이며, 에페소스에는 정치 조직이 두 그룹이 있었는데 하나는 보울레라고 불리는 원로원들이 여기서 회의를 개최했다고 한다. 또 하나의 그룹은 데모스라고 불리는 민회로서 에페소스인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이들은 오데온이 아닌 대극장에서 집회를 가졌다. 

대극장은 각종 공연이 열린 곳으로, 검투사들에겐 생사의 현장이었으며 기독교 박해 시기에는 교인들의 형장으로도 쓰였다. 처음엔 헬레니즘 시대 그리스형 극장으로 지어졌지만 현재 유적은 로마 시대에 건축한 것이다. 로마 클라우디우스 황제 시절 확장 공사를 했고 1단과 2단은 네로 황제 시절 올려졌으며, 트리야누스 황제 시절에도 증축을 했다.

원형의 극장은 폭 145미터, 높이 30미터, 구조는 3단으로 되어 있고 각 단은 22개 계단으로 오데온과 같은 구조로 되어 있다. 1단은 복원된 상태이며 2-3단은 복원 중으로 현재 출입은 금지되어 있다. 정면 3층의 무대 건물 안쪽의 오케스트라 기둥들과 부조, 삼각형의 벽감은 석상들로 화려하게 장식된 것이 특징이다.
 

아르테미스 신전 터 /flickr

아르테미스 신전

에페소스에서 가장 상상력을 자극하는 유적지이자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꼽힌다. 고대 그리스의 저술가들이이 극찬한 곳이기도 하며, 비잔티움의 철학자 필론은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 신전은 "신들을 위한 오직 하나의 집이다. 사람의 눈으로 보면, 이곳이 지상의 장소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곳은 불사의 신들의 천상 세계가 지상으로 내려온 것이다"고 기술했다.

리디아 왕 크로이소스의 협조로 건축되었으며, BC 356년 헤로스트라토스의 방화로 소실되고 난 후 재건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오니아 양식의 신전으로 기둥의 갯수만 127개로 거대한 규모였으며 몇번의 증축과 개축을 통해 위엄을 갖추게 된다. 번영의 시기를 거쳐 규모를 키웠던 신전은 BC 3세기 중반, 번영이 절정에 달했고 각지에서 순례객들이 몰려들기도 했다.

영국의 고고학자이자 건축가였던 존 우드가 대영박물관의 도움을 얻어 아르테미스 신전 발굴에 나섰고 11년간의 노력 끝에 1869년 아르테미스 신전 터를 발굴했으나 지금은 기둥 한 개만 남아 있다.

켈수스 도서관 /flickr
켈수스 도서관은 에페소스에서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장소 중 하나다 /flickr

켈수스 도서관 

2세기, 켈수스의 아들 율리우스 아퀼라가 그의 아버지를 기리기 위해 완성한 건물이다. 켈수스는 당시 이 지역의 총독으로 부임해 통치하였으며 이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켈수스의 무덤은 1층 중앙 아래 지하에 위치해 있다. 

도서관 내부는 습기 방지를 위해 이중 벽으로 되어 있어 수천 권의 두루마리책을 보관할 수 있었으나 3세기 들어 고트족 침략 때 안타깝게도 모두 소실되었다. 대략 5천권에서 1만 2천권의 두루마리 장서들이 이 도서관에 있었다고 한다.

입구 앞에는 예지, 덕성, 사려, 학술의 상징을 나타내는 4개의 여신 동상들이 자리하고 있다. 이 4개의 여신 동상은 모조품이고 실제는 오스트리아 비엔나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도서관은 많은 부분이 무너졌지만 외벽은 아직도 굳건하며 벽에는 화려한 문양과 글자들이 새겨져 있다.


과거의 영광을 간직한 고대도시 에페소스 

 

에페소스는 해마다 많은 관광객들로 발걸음으로 분주하다 /flickr

에페소스는 고대부터 가장 크고 보존 상태가 좋은 도시 중 하나로, 지중해의 대표적인 유적지 중 하나다. 여러 나라의 문화들, 역사, 예술이 이 지역에 존재했던 복잡한 역사들을 보여주는 곳이기도 하다.

에페소스 유적에 세워졌던 건물들은 후기 시대의 건축물들을 짓는데 쓰였기 때문에 현재는 부서지고 남겨진 잔해들이 유적으로 흩어져 있다. 그러나, 지리학자 스트라본이 “에페소스는 로마 다음으로 큰 도시였다”고 기록할 정도로 한때 번성했던 에페소스에서 살았던 사람들이 향유했던 문화는 지금도 유적지 터 곳곳에서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에페소스의 거대한 유적지와 근접해 있는 역사적 유물들은 관광지로서의 성공과 동시에 고고학적 연구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2000년대 들어 에페소스에 지속적인 연구와 유지, 보존 등에 대한 관리 계획을 세워야 할 필요성이 점점 커짐에 따라 에페소스는 2004년 세계 유물 감시 목록에 포함되었으며, 이 유적지의 관광 관리 요구 사항들 또한 추가로 포함되었다. 에페소스의 발굴은 지금도 국가들 및 국제 연구 기관들이 공동으로 수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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