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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가장 잘 아는 '나'의 이야기를 그린 화가, 프리다 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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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가장 잘 아는 '나'의 이야기를 그린 화가, 프리다 칼로
  • 김서진 기자
  • 승인 2021.01.15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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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다 칼로 /flickr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일명 '갈매기 눈썹'으로 우리에게도 친숙한 그림을 그린 화가는 멕시코의 프리다 칼로이다. 그의 많은 초상화, 자화상, 그리고 멕시코의 자연과 공예품에서 얻은 영감으로 만든 작품들은 사람들에게 이미 친숙하다. 그는 멕시코 사회에서 그의 정체성, 성별, 계급, 인종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를 했으며, 멕시코의 민속 스타일을 작품에 차용했다. 

그의 그림은 자전적 요소가 꽤 강했고, 사실과 환상을 적절히 섞어 그림을 그렸다. 멕시코의 정체성을 규명하려는 혁명 이후 일어난 멕시코 시카고 운동과 더불어 프리다는 초현실주의나 마술 현실주의자로 묘사되었지만, 그는 자신이 초현실주의자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다 1925년 당한 버스 사고는 그의 몸을 황폐화시켰고, 평생 신체적인 고통에 시달리게 했지만 근 30년간 그는 일관성 있게 섬세한 작품을 만들어낸다. 그는 자신을 끊임없이 묘사하며 동시에 탐구를 계속했고, 의문을 제기했으며, 자신의 정체성을 그림에 담았다. 육체적 고통으로 인한 자신과의 싸움, 그리고 디에고 리베라와의 어지러운 관계 속에서 야기된 감정적인 괴로움과 평범하지 않은 일화 등을 그림에 표현했다. 


프리다 칼로의 일생 

 

거울을 보고 있는 프리다 칼로 /flickr

프리다 칼로는 1907년 멕시코시티 교외 코요아칸에서 태어났다. 헝가리계 독일인인 아버지 기예르모 칼로는 딸에게 '프리다'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프리다'는 독일어로 평화를 의미했다. 어머니 마틸다가 출생 직후 병이 나는 바람에 프리다는 원주민 유모의 젖을 먹고 자랐으며, 이 기억은 프리다가 자신을 멕시코인으로 여기는 정체성의 근거가 됐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미술을 좋아했다. 원래 화가가 될 생각은 없었다. 6살에 척추성 소아마비에 걸려 9달간 집에 있어야 했고, 가느다란 오른쪽 다리를 가리기 위해 양말을 겹쳐 신고 굽이 높은 신발을 신어야 했다. 공책에 스케치를 하며 시간을 보내던 그는 1925년 집이 가난했던 탓에 돈을 벌기 위해 판화를 찍는 견습생으로 일하게 된다.

그러다 1925년 9월 27일, 그는 학교에서 집으로 버스를 타고 가던 중 전차와 버스가 충돌하는 사고를 당한다. 그의 등, 골반, 소아마비에 고생하던 다리는 부러지고 발은 탈구되어 망가졌다. 그의 뼈가 부서지는 소리는 구급차가 달려오는 소리보다 그에게 더 크게 들렸을 것이다. 

프리다는 근 한달간을 석고 깁스를 한 채 누워 있어야 했다. 아무도 그가 살아남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가 퇴원하고 나서 거의 2년간은 침대에서 꼼짝없이 누워 휴식만을 취해야 했다. 있었던 그의 남자친구도, 그의 꿈도 사라졌다. 쌓여가는 치료비를 내기 위해 그의 아버지는 집을 팔아야 했다. 이때부터 프리다를 평생 괴롭히는 고통도 시작됐다. 

 

상처입은 사슴 The Wounded Deer (1946) /flickr

그는 1938년 그의 전시회가 열리기 전, 전시회 갤러리 주인인 줄리앙 레비에게 편지를 썼다. "난 자동차 사고로 침대에 누워 있던 1926년까지 그림을 그릴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전 침대에 누워 있기만 하는 것이 너무 지루했기에 뭔가를 하기로 결심했어요. 아버지가 유화 그림 몇 점을 빌려주고, 내가 앉을 수 없어서 어머니가 특수 제작된 이젤을 주문해 주었답니다. 전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사고 후 프리다는 침대에 등을 기댄 채 그림을 그렸다. 그림은 그에게 가능한 유일한 활동 중 하나였다. 이젤 위에 놓인 거울은 프리다가 그림을 그리며 자신을 볼 수 있게 해 주었으며, 그림은 프리다가 자신의 정체성과 존재에 대해 계속 질문하고 탐구하게 해 주었다. 불의의 사고와 혼자 고립된 채 회복했던 그 시간이 프리다는 다시 뭔가를 시작할 수 있다는 욕망을 갖게 했다.
 

디에고 리베라와 프리다 칼로 /flickr

예술에 대한 관심이 컸던 프리다는 1927년 멕시코 공산당에 입당을 하고, 그곳에서 그는 동료였던 멕시코 예술가인 디에고 리베라를 만나게 된다. 1929년 둘은 결혼했고, 1930년대 초반까지 멕시코과 미국을 여행하며 시간을 보낸다. 이 기간 동안 그는 그만의 예술적 스타일을 확립하고, 멕시코 민속 문화에서 주된 영감을 얻는다.

프리다의 그림은 1938년 뉴욕의 줄리앙 레비 갤러리에서 첫 단독 전시회를 갖게 되었고,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1939년 파리에서 또 다른 전시회가 이어지고 루브르 박물관이 그의 그림을 구입했다. 앞으로도 그의 앞길은 탄탄대로일 것만 같았다.

그러나 남편 리베라의 여성 편력이 갈수록 심해졌고, 급기야 프리다의 여동생과 바람을 피우는 등 프리다에게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리베라는 자신에게 일부일처제는 불가능한 일이라고 프리다를 설득했다. 프리다는 화가 나 울부짖으며 가끔 벽에 도자기 접시를 집어던졌다. 이후 가끔 리베라의 새로운 정부를 알게 될 때마다 프리다는 그 여자를 유혹함으로써 리베라에 대한 작은 복수를 즐겼다.

프리다는 이후 피부가 썩어 들어가는 회저병으로 인해 발가락을 절단하는 수술을 받고, 골수이식 수술 중 세균에 감염되어 여러 번의 재수술을 받아야 했다. 그는 고향인 코요아칸에서 앵무새와 원숭이를 기르며 정신적인 안정을 되찾으려 노력했다. 모든 시간이 고통이었지만 프리다는 그림을 계속 그렸고 학생들에게 미술을 가르쳤다. 리베라는 여전히 밖을 나돌아다녔지만 이 문제는 프리다에게 더이상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극심한 고통과 그림만이 그의 머릿속을 지배했기 때문이다.
 

'Self-portrait' (1940) /flickr

건강이 날로 악화되던 프리다는 하루의 대부분을 누워서 지냈고, 앉아 있어도 휠체어에 의존해야 했다. 그래도 그는 서너시간은 그림을 그리는 데 투자했다. 1953년 그를 기념하는 프리다 기념전이 열렸고, 일어나지도 못했던 프리다는 침대를 전시회장으로 옮겨 개막식 축하연에 참석할 수 있었다. 1954년 7월, 프리다는 폐렴 증세 악화로 47년간의 짧은 생을 마감한다. 그의 마지막 일기에는 '이 외출이 행복하기를,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 이라 씌여 있었다고 한다. 


프리다 칼로의 화풍 


프리다의 화풍은 그가 살았던 멕시코와 깊은 관련이 있다. 그는 초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화가들의 작품들로 공부를 했으며, 이 영향은 화풍에 고스란히 남게 된다. 그러나 점점 그의 화풍은 멕시코의 장식 미술, 벽화 운동의 화풍을 따라갔다. 이것은 그의 남편인 리베라의 영향이 컸다.

리베라는 멕시코의 상징이나 민속, 예술에 관심이 많았다. 프리다도 멕시코의 전통 의상을 즐겨 입었다. 다채로운 테우아나 블라우스와 스커트 등의 이 토착 의상들과 장신구들은 그에게 문화적 자긍심을 고취시키는 도구가 되었다. 그의 이 스타일은 멕시코에 대한 그의 충성을 의미했고, 그가 해외에 있는 동안 멕시코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을 지지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Self-Portrait on the Border of Mexico and the United States 1932' /flickr

멕시코는 프리다에게 혁명의 장소이기도 했다. 당시 멕시코는 정치 상황이 예술 분야와 맞물려 각종 운동을 만들어냈다. 멕시코 정부를 장악했던 플루타르코 카예스는 민중들의 문맹률을 고려해 계몽이 힘들다고 판단, 문화 정책을 통해 대중 교화를 시도한다.

그래서 리베라 같은 당대 화가들에게 벽화 작업을 지시하고 멕시코 미술에서 벽화가 인기를 끌었음에도 불구하고, 프리다는 대신 아마추어 예술가들이 작은 금속판에 종교 그림을 그리는 것을 택했다. '멕시코와 미국 국경에 있는 자화상 Self-Portrait on the Border of Mexico and the United States 1932' 등이 그 예다. 

프리다는 작품들 중에서도 많은 자화상을 남겼다. 그의 자화상들은 식민지 시대에 유행했던, 상반신까지 나오는 초상화와 비슷하다. 또한 그의 그림은 종종 뿌리 그림이 특징인데, 뿌리들은 그를 땅에 서 있게 하기 위해 몸 밖으로 자라난다는 특징이 있다. 이것은 개인의 긍정적인 성장을 의미하기도 한다. '나와 나의 조부모 My Grandparents, my Parents, and I' 란 작품에서 프리다는 고대 나무에서 자란 리본을 들고 있고, 그의 왼발은 땅 밖으로 자라나는 나무 줄기를 표현했다. 이는 프리다와 멕시코의 인간적인 통합, 일체감을 반영한다. 
 

Frida Kahlo - My Grandparents, my Parents, and I /flickr

그는 버스 사고로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것, 세 번에 걸친 유산, 그를 평생 괴롭힌 고통을 예술로 승화시켰다. 그의 많은 그림들은 그가 피를 흘리고, 벌어진 상처를 보여주는 고통의 이미지가 많다. 특히 출산과 유산을 다루는 것은 누군가가 살기 위해 다른 누군가를 희생시키는 것에 대한 죄책감을 표현한다.

그는 자신의 몸을 그림에서 여과없이 표현한다. 상처입은 상태, 부서진 상태 등 파격적인 방식으로 여자의 몸을 묘사했다. 내부의 장기를 노출하고, 피가 나고 망가진 상태의 자신의 몸을 묘사함으로써 프리다는 육체적 고통의 시각적 상징으로 표현하며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정적인 고통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끔 했다. 

그래서 프리다의 작품은 종종 환상적이고, 때로는 괴팍한 것처럼 묘사되고는 했지만 정작 그는 자신이 초현실주의자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프리다는 초기 프랑스 시인이자 초현실주의의 창시자인 앙드레 브르통에 의해 본격적으로 알려졌는데, 브르통은 그의 예술을 자수성가한 초현실주의로 받아들였으며 그의 작품을 멕시코 시티에서 열린 1940년 초현실주의 국제 전시회에 포함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프리다는 "그들은 내가 초현실주의자라고 생각했을 테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고 밝힌다. 그의 인생에는 유년기의 질병, 버스 사고, 유산, 남편의 외도 등 장애물이 너무나도 많았다. 그랬기에 그는 초현실주의자들처럼 무의식과 꿈에서 영감을 받지 못했다. 모든 육체적, 정신적인 투쟁의 흔적은 고스란히 그의 작품에 반영되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그저 '난 꿈을 그리는 게 아니다, 나는 내 현실을 그릴 뿐이다' 라고 말하곤 했다. 
 

]Self-Portrait with monkeys' (1943) /flickr

프리다는 유명한 페미니스트인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남성적인 멕시코 사회에서 그는 예술을 통해 낙태, 가부장제, 성차별, 계급 등 여전히 여성을 제한하는 유리 천장을 떠올렸다. 그는 여성들에게 강요된 사회적 압력과 미적 기대에 대항하는 무기로 잘 알려진 그의 눈썹을 사용했다.

프리다는 미용 기준에 대해 반항하는 의미로 그의 눈썹을 강조했다. 그는 그림에서 이, 얼굴 털, 눈썹을 돋보이게 작업하며 그것들을 감추기보다는 특별하게 만들었다. 그는 아름다움, 성별, 여성 해방에 대한 생각을 넓히려고 노력했다. 그는 자신을 남자도 여자도 아닌 한 개인이라고 생각했으며, 자신의 남성적인 면과 여성적인 면 모두를 수용했다. 프리다는 복싱을 하고, 가끔 더러운 농담을 던지고, 술 내기에서 이기고, 남자처럼 옷을 입었다. 그는 단지 이런 일상을 편안하게 느끼며 삶을 살았다.


프리다 칼로의 작품

 

 'Frieda and Diego Rivera' (1931) /flickr

▲ 프리다와 디에고 리베라 'Frieda and Diego Rivera' (1931)


이 그림에서 마치 프리다는 아내의 역할이 어떤 것인지를 시험삼아 그려본 것 같은 느낌을 풍긴다. 그는 화가라는 자신의 정체성에 초점을 둔 게 아닌, 재능 있고 능력받는 남편의 손을 잡은 수동적인 자세를 선택했다. 실제 그가 대부분의 그림을 그린 기간 동안, 프리다는 리베라의 그림자에 가려져 주목을 받지 못했다. 프리다는 죽고 나서도 나중에야,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게 된다.

리베라와 프리다 부부는 종종 코끼리와 비둘기라고 불렸다고 한다. 리베라는 코끼리처럼 몸집이 매우 크며 안정감 있게 서 있고, 그 옆에서 비둘기처럼 작은 프리다는 작은 발로 겨우겨우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두 사람은 이혼 후 경제 생활과 부부 관계를 함께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재결합했다.

프리다는 리베라에게 손을 내밀고 있고, 리베라의 다른 손에는 그가 유명한 화가라는 것을 알려주는 팔레트와 붓이 있다. 프리다는 그림에서처럼 주로 멕시코의 전통 의상인 테우아나 의복을 입었는데, 어릴 때 소아마비에 걸린 이후 다리를 감추기 위해 긴 멕시코 치마를 입었다고 한다. 이 테우아나 의상은 프리다 본인이 멕시코의 토착민이라는 것을 상징한다. 
 

 'Henry Ford Hospital - The Flying Bed' (1932) /flickr

▲ 헨리포드 병원 - 날고 있는 침대 'Henry Ford Hospital - The Flying Bed' (1932)


프리다는 1930년부터 1933년까지 벽화 제작을 의뢰받은 리베라를 따라 미국 샌프란시스코와 디트로이트, 뉴욕에 머물렀고 그 기간 동안 두 번의 유산을 했다. 사고로 부서진 골반으로 아이를 가질 수 없었기 때문에, 프리다는 아이를 가지고 싶었으나 그렇지 못해 절망하고 낙담했고, '헨리포드 병원'은 프리다 자신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탄생했다.

이 그림에서 프리다는 유산 후 피를 흘리며 침대 위에 누워 있다. 침대 위 누워 있는 여인 손에는 핏줄 같은 붉은 줄로 연결된 6가지의 물체가 보인다. 그들 중 하나는 태아로, 리본은 탯줄에 대한 은유를 암시한다. 사람의 하반신 모형과 침대 아래 맨 오른쪽 골반은 사고로 인해 손상된 뼈를 상징한다. 

침대 아래 맨 왼쪽 회색 기계는 의료 기구로 망가진 근육을 상징하며, 침대 위 맨 오른쪽에 있는 달팽이는 인디언 문화에서 임신과 탄생을 의미한다. 달팽이가 등껍질 속에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것은 달이 차고 기우는 것과 관련이 있고, 여성의 생리 주기와 섹슈얼리티를 상징한다. 마지막으로 침대 아래 가운데에 있는 보라색 꽃은 리베라가 프리다에게 준 것이라 한다. 
 

 'My Birth' (1932) /flickr

나의 탄생 'My Birth' (1932)


이 그림은 출산하는 사람과 아이 모두 죽은 것처럼 보이는, 한번 보면 잊혀지지 않을 것 같은 그림이다. 여성의 머리는 흰 천으로 가려져 있고, 자궁에서 나온 아이는 생명이 없어 보인다. 프리다가 이 작품을 그렸을 때, 그의 어머니는 프리다를 낳으면서 사산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 침대에는 '출생'과 '죽음'이 함께 존재함을 표현했다.

이 그림 속 모습은 프리다 자신이 태어나던 날의 기억을 재생한 그림이다. 남편 리베라가 프리다에게 자신의 삶의 이야기를 그려 보라고 권했고 그 시리즈 중의 첫번째 시도이다. 프리다는 '나의 탄생' 인 이 그림을 그리면서 어머니가 자신을 낳았을 때의 고통의 트라우마를 체험했다고 전했고, 실제 자신의 일기에도 자신이 태어난 날은 자신이 아이를 낳은 날이라고 쓰기도 했다. 

그의 유산 경험처럼, '나의 탄생'은 프리다가 아이를 잃은 것을 애도하는 동시에 그 트라우마로 인해 작품이 탄생할 수 있다는 힘을 상징한다. 그는 자신이 임신할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 경의를 표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그림의 마지막 부분을 비워 두었다. 이후 가수 마돈나가 이 그림을 샀다는 것이 전해져 온다. 
 

 'Frida Kahlo, Self-Portrait Dedicated to Leon Trotsky' (1937) /flickr

레온 트로츠키에게 헌정한 자화상 'Self-Portrait Dedicated to Leon Trotsky' (1937)


리베라의 외도로 힘들어하던 중, 프리다는 리베라를 대신할 만한 꽤 강렬했던 상대를 만났다. 바로 스탈린에게 쫓겨 멕시코로 망명을 왔던 트로츠키다. 소련에서 추방되어 여러 나라를 전전하던 트로츠키를 멕시코로 부른 것은 리베라였고, 리베라는 트로츠키 부부의 거처로 프리다의 친정집이었던 '푸른 집'을 제공했다. 프리다는 이때 트로츠키를 만났고, 그에게 매료된다. 

그 감정이 사랑인지 존경이었는지는 불분명하다. 둘의 사이가 연인이었다는 의견도 있고, 단순한 동료애였다는 의견도 있다. 어떤 감정이었든, 프리다가 트로츠키에게 선물한 자화상 속의 그는 밝고 경쾌하며 당당한 분위기를 풍긴다. 그림에서 프리다는 드레스를 입고 어깨에는 숄을 걸치고 있으며, 손에는 트로츠키에게 바치는 편지와 꽃다발을 들고 있는 모습에서 트로츠키에 대해 프리다가 어떤 마음이었는지를 조금이나마 알게 한다. 
 

 'The Two Fridas' (1939) /flickr

▲ 두 명의 프리다 칼로 'The Two Fridas' (1939) 


프리다의 가장 유명한 그림이며 가장 커다란 그림이기도 하다. 이 그림은 리베라와 이혼한 직후 완성되었다. 이 초상화는 프리다의 두 가지 다른 성격을 보여준다. 하나는 결혼 생활 이후 남편 리베라의 강력한 민족주의 영향으로 챙겨 입었던 멕시코 전통 복장인 테우아나 의상으로, 다른 하나는 프리다가 리베라와 결혼하기 전 독립적이고 현대적인 복장으로 입은 자신의 모습이다.

이 그림에서 두 프리다는 서로 손을 잡은 채 심장이 연결되어 있다. 전통적인 옷을 입은 프리다의 심장은 찢어져 있고, 찢어진 심장으로부터 연결된 동맥은 프리다의 오른손에 있는 수술용 집게에 의해 잘린다. 하얀 드레스에는 피가 떨어지고, 그는 과다 출혈로 죽을 위험에 처해 있다. 요란한 구름으로 가득 찬 폭풍 전야의 하늘은 프리다의 내적 혼란을 반영한다. 프리다는 남편 리베라의 지독한 여성 편력 탓에 1939년 이후 2년 동안 별거에 들어갔고, 이 그림은 당시 이혼 과정에서 겪었던 정서적 고통을 담았다. 
 

 'The Broken Column' (1944) /flickr

▲ 부서진 기둥 'The Broken Column' (1944)


1925년 9월 17일, 프리다와 그의 남자친구는 학교에서 집으로 가던 도중 타고 있던 버스가 전차와 충돌하는 사고를 당한다. 몇몇 사람들은 죽었고, 프리다는 치명적인 부상을 입는다. 철제 기둥이 그의 골반을 관통해 뼈를 부러뜨렸고, 병원 치료 후에도 그가 계속 고통을 호소하자 의사들은 엑스레이를 찍어 보았고 그 결과 그의 척추뼈 세 개가 사고로 변형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치료 내내 그는 석고로 된 코르셋을 입어야 했다. 

이 사고로 프리다는 의사가 되고 싶었던 꿈을 접었고, 평생 고통에 시달려야 했다. 이 그림에서 그는 마치 육체를 포기한 것처럼 멍하니 그림 너머를 쳐다보고 있다. 건조하고 갈라진 풍경 한 가운데 서 있는 그의 몸통은 등에 지지대가 되어 주는 금속 벨트로 둘러싸여 있다.

이 벨트는 그의 몸이 한쪽으로 쏠리거나 쓰러지는 것을 막아 주지만, 제일 눈에 띄는 건 그의 몸통 한가운데에 보이는 길다란 철제 기둥이다. 이 기둥은 그의 척추를 대신하며, 그의 얼굴은 눈물에 젖어 있지만 이것은 고통의 흔적은 아니다. 정작 그의 고통을 상징하는 것은 몸에 꽂혀 있는 수백 개의 못이다. 


일생 동안 자신의 이야기를 그린 프리다 칼로

 

영화 '코코'의 프리다 칼로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프리다는 일생 동안 주로 리베라의 아내로 알려졌으며, 문화 엘리트들 사이에서는 별난 성격의 사람일 뿐이었다. 그의 명성은 그가 죽은 후에야 커졌고, 1970년대 후반 페미니시트 학자들이 여성 및 서양이 아닌 국적의 예술가들을 미술사에서 배제하는 것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더 인정을 받게 되었으며, 시카고 운동은 그를 많은 우상 중의 하나로 만들었다. 그의 삶과 예술은 다양한 상품에도 영감을 주었고, 2017년 개봉한 디즈니-픽사 애니메이션 '코코'에서 나탈리아 감독은 영화의 조연으로 프리다를 등장시키기도 했다. 
 

1958년부터 공개된 프리다 칼로의 집(박물관) /flickr
프리다 칼로의 뮤지엄 내부, 휠체어와 이젤이 보인다 /flickr

코요야칸에 가면 프리다의 집을 볼 수 있다. 그의 집은 1958년 박물관으로 탈바꿈해 멕시코 시티에서 가장 인기 있는 박물관 중의 하나가 되었다. 매달 약 25,000여명의 방문객이 그의 집을 방문한다고 한다. 프리다는 2001년 미국 우표에 등장한 최초의 라틴 아메리카계 여성이 되었고, 루브르 박물관은 그의 자화상 중 하나를 구매했으며, 프랑스의 디자이너 엘사 스키아파렐리는 그를 기리는 드레스를 만들어 각자의 방식으로 그를 기억한다.

프리다가 남긴 그의 143점의 그림 중 55점이 자화상이었다. 그는 자신의 개인적 가치에 대한 성찰이 곧 훌륭한 예술로 만들어진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프리다는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잘 알았고, 거기에 독특함과 창조성을 더해 가치있는 작품을 만들 수 있었다.

그의 그림과 인생에서 했던 수많은 결정으로 보아, 그가 자신의 개인적인 가치를 얼마나 믿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프리다는 여성으로써, 예술가로써, 그리고 장애를 가진 사람으로써 어떤 장애물도 없이 그저 존재하는 자신에게 힘을 부여해 자신을 표현했다. 왜 그렇게 자화상을 많이 그렸냐는 질문에 프리다는, 이렇게 답했다.
 

"나는 너무나 자주 혼자이기에, 또 내가 가장 잘 아는 주제이기에 나를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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