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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끝에서 피어나는 염색의 아름다움, 인도네시아 ‘바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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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끝에서 피어나는 염색의 아름다움, 인도네시아 ‘바틱’
  • 전은지 기자
  • 승인 2021.01.08 09: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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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메이커 전은지 기자] 연말연초가 되면 내년에는 어떤 것이 유행하는 트렌드가 될지 각 분야 전문가들이 점친다. 그중에서도 트렌드에 민감한 곳이 패션계다. 많은 디자이너가 2021년 S/S 시즌에 유행할 프린트나 패턴으로 크고 작은 꽃무늬, 스트라이프, 체크, 추상적 프린팅, 타이다이 등을 꼽았다. 모두 화려하고 톡톡 튀는 컬러가 가득한데 코로나로 억눌렸던 개성을 표출하려는 느낌이다.
 

인도네시아 전통공예인 바틱 / flickr
인도네시아 전통공예인 바틱 / flickr

유행할 패턴 중에는 페이즐리 패턴도 있다. 이미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패턴이지만, 아메바를 닮은 듯한 오묘한 문양은 이국적인 느낌은 물론 고풍스러움까지 갖추고 있다. 인도네시아에도 이와 비슷한 기하학적인 패턴을 천 위에 직접 그리듯 염색하는 전통 기법이 있는데, 2009년 10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바틱(Batik)’이다.


신적인 능력이 깃든 전통예술

바틱은 천에 무늬를 넣기 위해 왁스를 발라 무늬가 들어가는 부분은 염색되지 않도록 하는 전통 염색 방법이다. 인도,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스리랑카, 필리핀 등 아시아 여러 국가에서 하는 방법이지만, 인도네시아의 바틱 공예가 가장 잘 알려졌으며, 특히, 인도네시아 자바섬의 바틱이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갖고 있다고 한다.
 

왁스를 떨어뜨려 점이나 선으로 표현해 염색한다 / pixabay
왁스를 떨어뜨려 점이나 선으로 표현해 염색한다 / pixabay

바틱은 ‘암바틱(ambatik)’이라는 자바어에서 유래했는데, 암바는 ‘그리기, 쓰기, 넓다’ 등을 의미하며, 틱은 ‘점’을 의미한다고 한다. 또는 바틱이라는 말이 점 또는 떨어뜨린다는 의미의 티틱(titik)과 관련되어 있다고도 전해진다. 이는 왁스를 천에 떨어뜨리면서 그리거나 점을 표현하는 바틱 공예기법을 떠오르게 한다.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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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틱은 공예기법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인도네시아 사람들에게는 섬유예술이자 정신이며 생활 그 자체라고 볼 수 있다. ‘인도네시아 바틱 모티브의 상징적 의미와 현대적 활용 사례(조민정, 2018)’에 따르면,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바틱 모티브에 신적인 능력이 부여된다고 믿었으며, 바틱과 관련된 의식을 중요하게 여겼다고 한다.
 

갓난아기를 감싼 천에 바틱 무늬가 염색되어 있다 / pixabay
갓난아기를 감싼 천에 바틱 무늬가 염색되어 있다 / pixabay

이들이 얼마나 바틱을 신성시하는지는 생활 모습을 보면 알 수 있다. 아이가 울면 달래기 위해 바틱 모티브가 새겨진 전통의상인 카인 판장(kain pandjang)으로 얼굴을 닦아주고, 아플 때는 바틱 문양을 머리에 올렸다고 한다. 또는, 자연재해나 악운을 막기 위해, 바라는 소망을 바틱 문양에 담아 새겼으며, 그 문양은 좋은 기운과 능력을 갖고 있다고 믿었다.


전통과 현대가 조합해 역사를 잇는 바틱 공예

바틱 공예는 전통과 현대적 방식이 모두 전해지는데, 툴리스 바틱과 찹 바틱, 프린트 바틱 등 3가지다. 자세한 제작과정과 용어는 ‘인도네시아 바틱의 전승과 활용(김순영, 2013)’를 참고했다.
 

툴리스 바틱 / pixabay
툴리스 바틱 / pixabay

툴리스 바틱(batik tulis)은 가장 대표적인 전통 방식으로, ‘찬팅(canting)’이라는 도구를 사용해 녹은 액체 형태의 왁스를 천 위에 흘리면서 방염을 하는 방식이다. 천 위에 연필로 밑그림을 그린 뒤, 찬팅으로 1차 방염 작업을 한다.
 

툴리스 바틱에 사용하는 도구인 찬팅 / flickr
툴리스 바틱에 사용하는 도구인 찬팅 / flickr

찬팅은 대나무 손잡이에 동이나 구리로 만든 왁스 홀더를 끼운 도구로, 왁스 홀더에 마치 작은 주머니 같은 가느다란 대롱이 달려있다. 이 대롱에서 왁스가 흘러나오는데, 대롱의 굵기도 다양하다고 한다.
 

왁스로 방염처리를 한 뒤 염색한다 / flickr
왁스로 방염처리를 한 뒤 염색한다 / flickr

염색이 되지 않을 문양을 왁스로 다 그렸다면, 1차 염색을 한다. 마른 뒤에는 천 위에 그렸던 왁스를 나이프로 떼어낸다. 이후 다른 색으로 다른 문양을 염색하려면, 앞의 과정을 반복하며, 마지막에는 염색한 천을 열탕 처리해 왁스를 제거한 후 건조한다. 보통 3가지 색으로 표현한다고 한다.
 

찹 바틱 / flickr
찹 바틱 / flickr
도장처럼 찍어 왁스를 발라 찍는 찹 / flickr
도장처럼 찍어 왁스를 발라 찍는 도구인 찹 / flickr

찹 바틱(batik cap)은 도장처럼 생긴 도구인 ‘찹’을 이용한다. 툴리스 바틱보다 한 단계 발전된 방법이라고 보면 된다. 찹에 새겨진 문양에 왁스를 발라 천에 찍어주는 방식으로 19세기 말에 개발됐다고 한다. 찹은 구리를 구부려 원하는 패턴을 만든 뒤 나무판에 박아서 만든 도구다. 도장처럼 찍어주기 때문에 툴리스 바틱보다 시간과 노동력이 절약된다.
 

프린트 바틱으로 인쇄되는 천은 긴 것이 특징이다. 전통의상인 카인 판장이 길게 입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 flickr
프린트 바틱으로 인쇄되는 천은 긴 것이 특징이다. 전통의상인 카인 판장이 길게 입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 flickr

프린트 바틱은 실크 스크린 기법을 활용해 기계로 찍어내는 방식이다. 세로로 긴 천을 접착제를 바른 테이블에 고정한다. 천 위에 스크린을 올려 스퀴지를 밀어내면서 잉크를 묻혀 문양을 프린트한다. 실크 스크린 기법이기 때문에 툴리스나 찹보다 5~7가지의 다양한 색 표현이 가능하다. 건조는 기계를 활용한다. 최근에는 프린트 기법으로 염색된 천 위에 툴리스 바틱으로 작업을 하는 등 전통과 현대 기법을 결합한 작업도 이루어진다고 한다.


지역과 문화에 따라 무늬도 의미도 달라

바틱 문양은 기하학적이지만, 그 안에는 의미가 모두 담겨 있다. 또한 전해진 지역과 문화에 따라 무늬도 다양해진다. 바틱 역사가 가장 오래된 인도네시아 자바에서도 중부, 북부, 서부에서도 그 차이가 명확하다.
 

바틱 문양 중 하나인 카웅(kawung) / flickr
바틱 문양 중 하나인 카웅(kawung) / flickr

‘인도네시아 바틱 모티브의 상징적 의미와 현대적 활용 사례(조민정, 2018)’에 따르면, 바틱 문화와 기술이 가장 빠르게 전파되고 귀중한 예술이라고 여긴 중부 자바에서는 18세기까지 왕족과 귀족들만 사용할 수 있는 바틱 문양을 정해서 제작하고 입도록 했다.

이곳의 바틱 모티브가 가진 특징은 빈 곳 없이 반복적으로 기하학적 무늬가 채워진다는 점이다. 점, 선, 십자 무늬, 대각선이나 나뭇잎이나 꽃 등 자연이 주된 형태였다. 색상도 인디고, 왕족의 색인 소가 갈색, 바탕에 사용하던 흰색으로 단조로운 편이다.
 

바틱 문양 중 하나인 카웅(kawung) / pixabay
바틱 문양 중 하나인 카웅(kawung) / pixabay

각각의 무늬는 이름과 의미가 다르다. 카웅(kawung)은 가장 오래된 문양으로 힌두교인들의 신성하고 질서 정연함을 표현했다고 한다. 아렌 야자나무의 열매의 단면을 표현했는데, 마치 꽃잎 4개가 활짝 피어있는 듯하다. 각각의 타원과 문양이 이루는 마름모는 힌두교에서 우주를 이루는 물, 불, 공기, 땅, 바람 등 5가지 원소를 의미한다고 한다. 그래서 이 문양을 사용하면 우주와 연결되며, 신에게 빨리 갈 수 있다고 여겨, 시신을 감쌀 때 사용한다.

이 외에도 전통 검을 상징하는 대각선 무늬의 파랑(parang), 불멸의 새 가루다를 상징하는 페이즐리 패턴을 닮은 싸왓(sawat), 자연과 조화롭게 행복하게 살아야한다는 의미가 담긴 원시림 무늬의 알라스알라산(alasalasan) 등이 있다.
 

구름 무늬의 메가맨둥 / flickr, pixabay
구름 무늬의 메가맨둥 / flickr, pixabay
새, 코끼리 등의 종교와 관련된 무늬도 있다 / flickr
새, 코끼리 등의 종교와 관련된 무늬도 있다 / flickr

항구도시였던 서부 자바 지역은 교역이 많은 지역답게 힌두교 외에도 무슬림, 중국 등 여러 나라의 종교와 문화가 뒤섞인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이곳의 바틱 문양은 종교적 색채가 강하다. 이슬람의 새, 힌두교의 코끼리 등 동물이 새겨지거나 중국의 영향을 받은 ‘메가맨둥(megamendung)’이라는 구름 문양이 대표적이다.
 

꽃무늬인 부케탄 / flickr
꽃무늬인 부케탄 / flickr

북부 자바도 서부와 비슷하게 다민족, 다문화의 역사를 가진 인도네시아의 특징을 볼 수 있다. 1850년 산업화가 시작되면서 네덜란드, 중국, 아랍 등 여러 나라의 영향이 바틱에도 고스란히 반영됐다. 찹을 사용해 많은 물량을 생산하는 것은 물론, 여러 가지 디자인을 찍어낼 수 있었다. 염료 역시 화학 염료를 사용했으며, 천에 직접 채색했다.

특히, 이 지역의 문양에는 네덜란드 문화가 큰 영향을 주어 외국인들에게도 거부감이 없는 꽃무늬인 ‘부케탄(buketan)’이 주로 사용됐으며, 색채 역시 붉은색, 청록색, 파란색 등 다른 지역과 다르게 화려했다.


옷부터 소파, 비행기까지 활용돼

바틱은 천 위에 다양한 무늬를 염색하는 것이지만, 독특한 문양은 여러 분야에서 활용되고 있다.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것은 전통의상이다. 인도네시아 여성들은 ‘끄바야(kebaya)’라고 부르는 긴 블라우스와 원피스를 입으며, 남성들은 긴 천을 허리에 둘러서 입는 카인 판장(kain panjang)을 입는다.
 

인도네시아 전통의상은 대부분 바틱 무늬로 되어있다 / pixabay
인도네시아 전통의상은 대부분 바틱 무늬로 되어있다 / pixabay
현대적 의상에도 바틱 무늬가 프린팅되기도 한다 / flickr
현대적 의상에도 바틱 무늬가 프린팅되기도 한다 / flickr

전통의상은 결혼식이나 축제 등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 주로 입는데, 다양한 바틱 모티브가 그려져 있어 화려하기도, 고풍스러워 보이기도 하다. 또는, 기성복에도 바틱 모티브를 넣어 현대적으로 입기도 한다.
 

소파나 쿠션 등 인테리어 제품에도 바틱 무늬가 더해진다 / pixabay
소파나 쿠션 등 인테리어 제품에도 바틱 무늬가 더해진다 / pixabay
화려한 무늬의 그릇들 / pixabay
화려한 무늬의 그릇들 / pixabay
문구류에도 바틱 모티브 디자인을 입힐 수 있다 / pixabay
문구류에도 바틱 모티브 디자인을 입힐 수 있다 / pixabay

인테리어 제품에도 바틱의 기하학적인 무늬는 빠지지 않는다. 물론 심플하고 모던한 분위기보다는 화려하면서도 이국적인 포인트를 주고 싶다면, 이런 소파나 쿠션을 배치하는 것도 좋다. 가구 디자인에도 바틱 무늬가 사용되는 때도 있다. 또는 그릇이나 문구류 등의 디자인에도 바틱 무늬가 활용되어 더욱 화려함을 더한다.
 

인도네시아 항공사 바틱 에어의 비행기 / flickr
인도네시아 항공사 바틱 에어의 비행기 / flickr
싱가포르항공 승무원 유니폼. 전통의상인 사롱 끄바야에 바틱 무늬가 있다 / 싱가포르항공 홈페이지
싱가포르항공 승무원 유니폼. 전통의상인 사롱 끄바야에 바틱 무늬가 있다 / 싱가포르항공 홈페이지

인도네시아의 저가항공사인 바틱 에어는 비행기에 바틱 무늬를 넣기도 했으며, 싱가포르항공의 승무원들은 1968년 파리 디자이너 피에르 발망이 아시안 바틱 원단을 사용해 디자인한 사롱 끄바야(sarong kebaya)를 유니폼으로 입기로 유명하다.
 

바틱은 외국인 관광객도 체험할 수 있다 / flickr
바틱은 외국인 관광객도 체험할 수 있다 / flickr

바틱은 체계적인 전승 교육이 이뤄지고 있다. ‘인도네시아 바틱 모티브의 상징적 의미와 현대적 활용 사례(조민정, 2018)’를 보면, 바틱 문화 전문 박물관을 개관하거나 학교 교육에 바틱 수업을 도입했다.

학생들은 유치원부터 초등학교까지 단계에 맞춰 밀랍으로 그림을 그리거나, 찹과 찬팅을 사용해 염색하는 과정을 배우게 된다. 또한, 컴퓨터 프로그램을 활용해 바틱 무늬를 만들거나, 생물 수업에서 천연 염색약을 배우고, 언어 수업에서는 바틱과 관련된 글을 사용하는 등 융합 교육도 이뤄진다. 인도네시아를 여행한 글이나 사진을 보면, 외국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체험 프로그램도 진행된다. 방법이 크게 어렵지 않기 때문에 누구나 쉽게 배울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바틱이라는 염색 기법도 신기하지만, 전통 수공예가 젊은 세대까지 전해지면서 역사나 문화에 대한 인식을 심어주고 자긍심과 그에 관한 관심까지 높아지게 하는 것은 부러운 부분 중 하나다. 모두가 지켜야 할 세계문화유산인 만큼 기하학적인 무늬가 염색을 통해 살아나는 그 기법이 더욱더 오래 이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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