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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카콜라 속 산타 클로스를 만들어낸 화가, 노먼 록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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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카콜라 속 산타 클로스를 만들어낸 화가, 노먼 록웰
  • 김서진 기자
  • 승인 2020.12.24 18: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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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먼 록웰의 산타 클로스 /flickr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어딘가 익숙한 이 삽화에 등장하는 산타 클로스를 누구나 한번쯤은 본 기억이 있을 것이다. 이 그림은 잡지 표지의 삽화가로도 유명한 노먼 퍼시벨 록웰(Norman Perceval Rockwell)이 그린 것으로, 록웰은 20세기 미국의 화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다. 대표적인 이 산타 클로스의 이미지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코카콜라, 콘플레이크 등의 광고에 등장하며 세계 사람들에게 너무나 친숙한 산타의 모습을 만들었다.

코카콜라 광고에 쓰였던 노먼 록웰의 산타 클로스 /flickr

록웰은 그 시대 미국 중산층의 생활을 솔직하면서도 인상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유명하며, 47년간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 잡지에 321개의 표지 그림을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주로 보이스카우트, 어머니, 어린이들, 할아버지, 할머니 등 일반 서민들이 사는 작은 도시와 시골 사람들의 일상 생활을 즐겨 그렸다. 실제 그의 미적 목표는 '나는 내가 원하는 대로 인생을 그린다' 였다. 

록웰은 자신의 첫 스케치를 미국과 스페인 전쟁에 등장하는 군함 그림으로 기억한다. 아버지인 자비스 워링은 그에게 다양한 문학 명작, 특히 고전 작가인 찰스 디킨스의 작품을 소리내어 읽어 주곤 했다. 어린 록웰은 아버지가 읊어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등장하는 인물들의 스케치를 했다.
 

노먼 록웰 /flickr

창조적인 재능은 저도 모르게 분출되는 것이라, 록웰을 보면 알 것 같은 말이다. 누군가는 그를 보고 예술이 예술가에게서 말 그대로 '흘러내린다' 라고 평한다. 록웰은 항상 예술가가 되길 원했고, 14살이 되던 해 그는 뉴욕예술학교에서 미술 수업을 듣다가 2년 후인 1910년 국립디자인 아카데미에서 미술을 공부하기 위해 떠난다. 그는 토마스 포가티 아래에서 삽화를 공부하고, 조지 브릿지먼 밑에서 해부학을 배웠다. 이 모든 것은 인물을 그리는 데 기본 기술을 연마하기 위함이었다.


노먼 록웰의 일생 


그의 본격적인 활동은 10대부터였다. 16세가 되는 생일 이전, 그는 크리스마스 카드 네 장을 시작으로 첫 작업 의뢰를 받는다. 다음 해에 그는 미국의 보이스카우트 공식 간행물인 "보이즈 라이프" 잡지의 아트 디렉터로 고용된다. 록웰은 이후 50년 동안 공식적으로 보이스카우트 달력을 꾸준히 작업한다.

노먼 록웰 'The Runaway' /flickr

21살이 되어 록웰의 가족은 하워드 크리스티 등의 유명한 삽화가들이 사는 뉴욕의 뉴로셸로 이사했고, 그곳에서 록웰은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에서 일했던 만화가 클라이드 포시스와 스튜디오를 차리게 된다. 

록웰은 자신의 포트폴리오를 착실히 만들어 나가며 작품에 대한 자신감을 쌓아갔다. 1916년, 22살의 록웰은 용기를 내 그 시대 가장 권위 있었던 잡지인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에 그의 첫 삽화 표지를 팔았고, 이것이 그의 인생에 있어 전환점이 된다.

노먼 록웰 'Boy with Baby Carriage' /flickr

그가 그린 첫번째 표지인 '유모차를 탄 소년' 이란 제목의 이 작품은 조금 성숙한 옷차림으로 유모차를 끄는 한 소년이 야구복을 입은 한 무리의 남자 아이들을 지나쳐 가는 모습을 하고 있다. 친구들은 야구를 하러 가는데 자신은 동생을 챙기러 가야 해서 마치 화가 난 것처럼 보인다. 이 잡지 커버는 록웰의 첫 커버였고, 동시에 그를 유명하게 만든 커버이기도 하다. 

노먼 록웰은 이후 약 300여개가 넘는 잡지 커버를 그리게 된다 /saturdayeveningpost

그는 첫 해에 잡지 표지를 8번이나 장식했고 이어 라이프, 문학 다이제스트, 컨트리 젠틀맨 같은 잡지에도 참여한다. 이 이후로 록웰은 47년에 걸쳐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의 323개의 원본 표지를 작업한다. 그의 그림 솜씨와 미국 사회에 대한 재치있는 묘사는 대중에게 주목을 받기 충분했고, 전국적인 명성까지 가져다 주게 된다.

그의 작품 주제는 점점 미국의 작은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을 반영하기 시작했고, 20세기 중반의 미국 생활을 묘사했던 그의 작품들은 1950년대까지 다른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복제되었다. 

노먼 록웰 'Freedom from Want' /flickr

1943년, 세계 2차대전이 열리는 동안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의회 연설에 영감을 받은 록웰은 '네 가지 자유 The Four Freedoms' 시리즈를 그리게 된다. "언론의 자유", "숭배의 자유", "원하는 것로부터의 자유", "공포로부터의 자유"라는 제목들이 붙은 이 작품들은 미국 작가들의 에세이와 같이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에 실렸다. 이 그림들은 다양한 해석을 동반하며 인기가 많았고, 전시회를 통해 미국을 돌며 전쟁 자금으로 1억3천달러를 넘게 모금하기도 했다.

1963년 그는 47년동안 인연을 맺었던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와 연을 끝내고 룩 매거진에서 일하게 된다. 10년간의 작업 기간 동안 그는 시민의 권리, 빈곤과의 전쟁을 선포한 미국의 정책, 그리고 우주 탐험 등과 같이 당시 그가 관심을 가졌던 문제들을 주제로 다루었다. 2007년 애크런 미술관에서 록웰의 작품 조사를 도왔던 큐레이터 바바라 타넨바움은 '그의 작품은 주제의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들도 생각을 하게 한다'고 말했다. 

노먼 록웰 'Boy and girl gazing at moon' /flickr

1977년 록웰은 '생동감 있고 매력적인 인물'로 선정되어 '대통령 자유 메달 Presidential Medal of Freedom'을 수상하는 명예를 안는다. 1년 뒤 1978년 11월, 그는 스톡브릿지에 있는 그의 집에서 84세의 나이로 평화롭게 눈을 감는다. 록웰은 생애 대부분의 작품을 기부했고, 토대로 세워진 노먼 록웰 박물관은 1973년 그가 죽기 전까지 살았던 매사추세츠 스톡브릿지에 문을 열었다. 록웰의 목표는 자신이 죽은 이후에도 사람들에게 예술 교육을 꾸준히 장려하는 것이었다. 


노먼 록웰의 작품들
 

 노먼 록웰 'The Four Freedoms' /flickr

네 가지 자유 The Four Freedoms

이 작품은 노먼 록웰이 1943년에 그린 4개의 유화 시리즈이다. 사진의 왼쪽으로부터 차례대로 각각 "언론의 자유", "숭배의 자유", "원하는 것로부터의 자유", "공포로부터의 자유" 등, 이 작품들은 현재 매사추세츠 스톡브릿지에 있는 노먼 록웰 박물관이 소장 중이다. '네 가지 자유'는 프랭클린 D 대통령이 1941년 1월 유엔에서 연설했던, 기본적으로 지켜져야 할 필수적인 인권 내용을 다루고 있다. 1943년 4주 연속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에 수필과 함께 실렸으며, 미국 재무부가 후원하는 순회 전시회의 하이라이트가 되었다. 

록웰은 대통령의 네 가지 자유 연설에 영감을 얻어, 연설에서 제시된 추상적인 자유의 개념을 미국인의 일상으로 나타냈다. "언론의 자유"는 마을 회의에서 연설하는 지역 주유소의 주인을 모델로 삼았고, "숭배의 자유"는 각각의 종교들을 대표하는 여덟 명의 사람을 주인공으로 설정했다. "원하는 것로부터의 자유"는 록웰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일컬어지는 그림이며, 한 오후에 요리사 할머니가 식탁에 둘러앉아 있는 가족에게 추수감사절 기념으로 거대한 칠면조를 대접하는 모습이다. "공포로부터의 자유"는 부모들이 잠들기 전의 아이들을 돌보는 감성적인 장면을 그렸다. 

이 시리즈는 20세기 중반 가장 널리 알려졌던 록웰의 예술을 보여주었으며, 그의 가장 잘 알려진 작품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여담으로, 유럽인들은 "원하는 것로부터의 자유"가 미국의 탐욕을 나타냈다며 비판했고 록웰은 나중에 자신이 칠면조를 너무 크게 그렸다고 생각했다고. 

노먼 록웰 'Triple Self-Portrait' /flickr

트리플 자화상 Triple Self-Portrait

노먼 록웰에게 유머와 겸손은 그를 대표하는 성향이었다. 1960년, 록웰은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자화상 중 하나를 제작한다. 자신을 까메오로 썼던 적은 있지만 중심에 서 있던 적은 한번도 없었기에 그는 자신을 표지의 주제로 삼는 것을 조금 망설였다고 한다. 이 작품은 록웰이 이젤을 향해 앉아 있는 모습이고, 그의 등을 사람들에게 보이고 있다. 메인 캔버스에 자신의 모습을 그리기 위해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는 록웰은 보는 사람에게 자신의 모습을 세 가지 유형으로 볼 수 있게 한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초상화를 세 가지 그림으로 보이게 한다. 

이 작품을 설명하며 록웰은 그림에서 자신의 안경이 불투명해 보이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내 안경은 안개로 덮여 있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모른다. 그렇기에 내 자신을 실제보다 더 얌전하고 멋지게 그릴 수 있었다'고 그는 전했다. 그는 자기비하라 불릴 정도로 겸손했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 그림이 화가, 관찰자, 그리고 일반인인 세 명의 예술가가 그린 사려깊은 초상화라 평한다. 

노먼 록웰 'Golden Rule' /flickr

황금률 Golden Rule

1960년대 미국은 변화의 과도기였다. 대중적인 취향에 맞춰 많은 잡지들은 삽화 대신 사진으로 표지를 대신했고, 이 기간 동안 록웰은 사회적 문제에 대해 탐구하기 시작했다. 다른 인종, 다른 종교를 가진 남자와 여자, 아이들이 모인 '황금률 Golden Rule'은 사회적이면서 의식적인 주제를 담고 있다. 그는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 Do unto others as you would have them do to you”는 주제를 보고, 자신이 찾고 있던 주제라 생각했다고 한다. 록웰은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함께 모이는 것을 묘사하려고 노력했고, 그게 이 작품이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라 말했다. 

이 그림의 모델들은 지역의 교환 학생과 관람객들이다. 1961년 진행된 인터뷰에서 록웰은 이렇게 말한다. "여기엔 다양한 인종이 있으며, 스톡브릿지의 은퇴한 우체부도 있다" 그는 이 모델들이 자신의 지하실 스튜디오에서 끝내지 못했던 '유엔 United Nations' 초기 스케치에서 나온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이 그림을 작업하며 모든 사람들이 아무 두려움 없이 평화롭게 살 수 있기를 바랐다.

노먼 록웰 'The Problem We All Live With' /flickr

우리 모두 함께 안고 살아가는 문제 The Problem We All Live With

'우리 모두 함께 안고 살아가는 문제'는 록웰의 1964년 그림이다. 미국 시민권 운동의 상징으로도 여겨지는 이 그림은 미국 연방 대법원이 '공립 학교의 인종분리 정책은 위헌' 이라는 판결의 영향으로 태어났다. 당시 캔자스의 한 초등학생이었던 흑인 소녀 '린다 브라운'은 집 근처에 있는 백인 초등학교를 다닐 수 없어 매일 1마일(약 1.6km)을 걸어 흑인들이 있는 초등학교로 다녀야 했다. 린다의 아버지 올리브 브라운은 유색인종권리향상위원회(NAACP)의 도움으로 캔자스 교육위원회를 상대로 3년에 걸친 재판 끝에 1954년 승리를 하게 된다. 이 판결은 흑인인권운동의 시발점이 되었고, 1964년 흑인에게도 실질적 참정권을 부여하는 민권법이 제정되는 계기이기도 했다.

이 그림에서 여섯 살의 흑인 소녀 '루비 브릿지스'는, 미국 보안관들의 호위를 받으며 뉴올리언스에 있는 백인 학교로 첫 등교를 하는 모습이다. 주민들의 항의와 KKK단의 협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연방 보안관이 아이 옆에 붙어 등교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림에서 보안관의 얼굴은 보이지 않고, 뒷쪽 벽에는 흑인을 비방하는 단어인 '니거 nigger' 가 쓰여 있다. 벽에는 사람들이 던진 듯한, 부스러지고 흩뜨려진 토마토 조각들도 보인다. 그러나 정작 그들을 향해 항의하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다. 그림은 관찰자의 시점으로 그려졌기 때문이다. 이 그림에서 록웰은 흑인을 제3자나, 보잘것 없는 역할이 아닌 단독 주인공으로 배치했다. 

룩 매거진에 이 그림이 실린 후 록웰은 메일 하나를 받았는데, '백인들의 배신자' 라는 비난이 적혀 있었다. 가장 충격적이었던 메일은 뉴올리언즈의 한 남자가 보낸 내용이었다고 한다. 그는 록웰의 작품을 가리켜 '룩 같은 곳에서 인종 통합 범죄에 이용당하는 악랄한 광고' 라 칭했으나, 이런 비난들은 앞으로의 록웰의 결심을 더 굳힐 뿐이었다. 1967년, 그는 다시한번 아이들을 모델로 인종차별의 해체를 담은 그림들을 그리기도 했다.  

노먼 록웰 'Saying Grace' /flickr

식사기도 Saying Grace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의 1951년, 11월 24일 추수감사절호 표지로 쓰인 '식사기도 Saying Grace'는 붐비는 식당에서 기도 중인 한 노파와 어린 소년을 묘사하고 있다. 담배를 물고 테이블 건너편에서 몸을 뺀 채 쳐다보고 있는 남자와 무표정의 또 한 남자, 왼쪽에 서 있는 살짝 찡그린 표정의 남자, 손에 담배를 들고 이들을 쳐다보는 남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은 이 두 사람에게 가 있다. '식사기도'는 경건히 기도하는 두 사람과, 그 두 사람이 약간 당황스러운 듯한 관찰자들을 그렸다.  

이 작품은 식당에서 기도를 올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본 한 독자의 제안으로 그려진 것이다. 처음 록웰은 이 그림의 배경으로 맨해튼의 타임스퀘어 레스토랑에서 촬영을 하려 했지만, 계획이 바뀌어 배경은 한 기차역의 식당으로 정해졌다. 그는 이 작품을 구상하면서 타임스퀘에서 버몬트까지 직접 테이블과 의자 세트를 트럭으로 싣고 오는 정성을 보였다. 그림을 그리기 전 친구들과 이웃 사람들까지 동원해 만족스러울 때까지 수백장의 사진을 찍으며 장면을 연출한 후에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참고로 그림의 기도하는 아이는 노먼 록웰의 아들 자비스 록웰이 모델이다.

한편, AP통신은 미국 뉴욕에서 열린 소더비 경매에서 이 '식사기도'가 4600만 달러(약 487억3700만 원)에 낙찰돼 록웰의 미술품 사상 최고가를 경신했다고 밝혔다. 


그에게 일상은 곧 예술 그 자체였다
 

곧 크리스마스인데 왠지 지쳐 보이는 산타 클로스다 /flickr

록웰의 놀라온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시대의 미술사학자들에게 호평을 얻지는 못했다. 그의 작품에 대한 전시나 학술적 분석도 거의 없었으며, 많은 사람들은 그를 구닥다리 현실주의자일 뿐이며 그의 예술은 지나치게 감상적이라는 평을 내렸다.

그러나 그의 죽음 이후 학자들은 그를 재평가하기 시작했고, 1969년 스톡브릿지에서 개관한 노먼 록웰 박물관과 1999년 미국인을 위한 사진전을 기획한 애틀란타 하이 미술관 등에서는 그를 기리는 전시회가 열렸다. 록웰의 향수가 어려 있는, 사람들의 쾌락과 고통의 감정을 묘사한 그의 그림들과 삽화는 지금도 미국 사회 전역에 살아 있다.

록웰은 '깊게 생각하는 게 아니다, 그저 모르는 사람들에게 내가 관찰한 미국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했다. 그는 예술가가 되어야 하는 것과 현대의 관념 사이에서 항상 갈등했지만 결국 인생을 보고 싶은 대로 그리기로 선택했다. 그는 사람의 감정들을 포착하고, 사람들의 삶을 관찰하는 것에 아주 능했다. 록웰은 그림으로 사람의 감성을 사로잡을 줄 아는 사람이었고 그가 선택했던 주제, 독특한 화풍은 그를 미국의 예술가들 중에서도 널리 알려지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지금도 록웰은 미국에서 가장 사랑받는 화가 중 한 명으로 굳건히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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