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21-10-21 13:40 (목)
물랑루즈를 사랑했던 몽마르뜨의 작디작은 화가,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
상태바
물랑루즈를 사랑했던 몽마르뜨의 작디작은 화가,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
  • 김서진 기자
  • 승인 2020.12.02 17:0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스케치로 표현된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 /flickr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의 본명은 '앙리 마리 레이몽 드 툴루즈-로트렉-몽파'로, 샤를마뉴대제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귀족 가문 출신이다. 당시 유럽의 귀족들은 혈통 유지를 위한 근친혼이 흔했고, 이로 인해 유전적 결함을 가진 아이들이 태어나곤 했다. 로트렉의 부모 역시 이종사촌 사이다. 근친혼으로 태어난 탓에 로트렉은 어렸을 때부터 자주 아팠다고 한다. 파리가 정치적인 안정과 문화적인 풍요를 누렸던 벨 에포크(프랑스어로 좋은 시절을 뜻한다) 때 활동했던 후기 인상주의의 대표적인 화가로 꼽힌다. 

로트렉은 주로 파리 몽마르뜨에서 술집이나 집창촌 등을 소재로 그림을 그렸다. 유흥을 사랑하는 귀족 출신이었던 그는 물랑 루즈의 VIP로, 밤마다 관람한 공연의 소리를 녹음하고 방문한 업소들에 있는 사람들을 그렸다. 그는 화가면서 동시에 나레이터이기도 했다. 그의 그림, 판화, 포스터들은 그가 살았던 시대의 변화와 어수선함이 담겨 있다. 로트렉은 귀족 가문 출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몽마르뜨르의 노동자 계층과 거기서 살았던 사람들에게 예술적 영감을 이끌어내 작품을 창조했다. 그의 그림엔 물랑루즈에서 일하는 댄서가 등장하며, 건강 검진을 위해 줄을 서 있는 매춘부들이 등장한다. 로트렉의 삶은 댄스 홀, 카바레, 클럽의 지저분한 분위기가 짙은 곳에 꽤 오랜 시간 머물러 있었다.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의 파란만장한 생애

거울에 비친 자화상 Self Portrait in Front of a Mirror /Web Gallery of Art

선천적으로 좋지 못했던 로트렉의 건강 상태는 부모의 근친혼에서 비롯됐다. 그는 13살 때 사고로 오른쪽 대퇴골이 골절되고, 14살 때 또 의자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당해 왼쪽 대퇴골이 골절되며 두 다리의 성장이 멈춰버리게 된다. 나이를 먹은 로트렉은 몸은 성인이었지만 허리 아래는 자라지 않은 아이 상태였는데, 의사들은 이를 두고 이유를 알 수 없는 유전적 장애 또는 툴루즈-로트렉 증후군이라고 불렀다. 현대에 와서 알려진 그의 병명은 왜소증이었다고도 한다. 어쨌든 그의 다리는 더이상 자라지 않았고, 성인이 되었어도 키는 154센티로 작았다. 그는 항상 지팡이에 의지해 일생 내내 힘들게 걸어다녀야 했다. 

그 때문이었는지 로트렉은 다리가 아팠던 동안 주변 사람들의 움직임이나 사물을 꽤 오랫동안 관찰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자연히 책을 읽으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그는 프랑스 니스에 머무는 동안 르네 프린스토에게 그림 실력을 인정받게 된다. 프린스토는 로트렉의 어머니를 설득했고, 로트렉은 초상화가 레옹 보나 밑에서 그림 공부를 시작한다. 로트렉의 어머니는 로트렉이 존경받는 화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로트렉은 이후 보나와 같이 그림 공부를 하며 20년간 몽마르뜨에서 시간을 보낸다. 

1882년, 로트렉은 페르난도 코르몽의 스튜디오로 자리를 옮겨 공부하면서 친구들을 만난다. 이때 그는 에밀 버나드, 빈센트 반 고흐를 친구로 사귀게 된다. 코르몽은 엄격한 성향이 아니었기 때문에 자신의 제자들이 그림을 그릴 대상을 찾아 파리의 이곳저곳을 배회하는 것을 흔쾌히 허락했다. 이 기간 동안 로트렉은 한 매춘부와 첫 만남을 가지게 되고, 마리 찰레라는 이름의 매춘부를 주제로 첫 그림을 그렸다. 이후 그는 어두움으로 점철된 이 유흥가에 하염없이 빠져들며 작품을 창조하기 시작한다.
 

소파 The Sofa, ca /flickr

그는 말년에 알코올 중독과 파리 사창가를 들락날락거리며 얻었던 매독에 고통받았는데, 여기엔 신체적인 콤플렉스도 한몫했다. 그는 신체적 흠결 때문에 조롱받거나, 축구나 야구 등 야외 활동도 할 수 없었다. 그에게 도피처는 알코올이었다. 로트렉은 매일매일 많은 술을 마셨고, 심지어는 짚고 다녔던 지팡이에도 홈을 파 술을 채워 언제든지 술을 마실 수 있도록 했다. 사회에서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즐거운 삶을 살 수 있었던 그를 덮쳤던 장애 때문에 평소에 로트렉이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았는지는 그가 했던 말을 보면 알 수 있을 정도다. '난 평생 쓰레기가 실린 수레에 매여 있는 상태일 것이다' 

로트렉은 탈출구를 알코올 말고도 파리 사창가의 세계로 정했다. 그러나 단지 성적인 쾌락만을 이유로 매춘부들과 시간을 보낸 건 아니었다. 그는 아마도 자신의 장애 때문에 매춘부들과 동질감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단순히 그들에게 끌린 것뿐만이 아닌, 자신의 친구 아님 가족으로까지 생각했다.

동료 화가였던 에두아르 비야르는 "귀족적인 정신을 갖췄지만 신체에 결함이 있던 그에게 신체는 멀쩡했지만 도덕적으로 타락한 매춘부들이 묘한 동질감을 줬을 것이다"라고 추측하기도 했다. 로트렉을 죽음으로 몰고 갔던 알코올과 사창가에서의 경험은 그럼에도 그에게 땅을 걸어다니게 했던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카페에 있는 브왈로 씨 Monsieur Boileau at the Café /flickr

그는 많은 그림을 마분지에다 그렸고, 독특한 선과 색을 창조하기 위해 특별히 희석시킨 유화 물감 또는 구아슈나 템페라 물감을 혼합한 물감을 사용했다. 그의 작품 덕분에 잔 아브릴과 라 굴뤼 같은 무용수들의 이름이 오늘날까지도 알려질 수 있었다. 로트렉은 폴 고갱과 프란시스코 고야, 그리고 에드가 드가로부터 색채의 사용법, 생기 넘치는 양식, 주제 선정의 문제 등 영향을 받았다.

로트렉은 자신의 모델이자 파트너였던 수잔 발라동을 포함하여, 다른 화가들을 개인적으로 가르치기도 했다. 그의 유화는 어두우면서도 신선하고 아름다운 색조와 독자적인 작풍으로, 그가 한평생 머물렀던 파리의 수많은 집창촌에서 만났던 사람들에 대한 통찰과 깊은 우수를 느끼게 한다.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 세상의 작품들 

물랑루즈 라 굴뤼 Moulin Rouge La Goulue /리차드 H. 드리하우스 컬렉션.

물랑루즈 라 굴뤼 Moulin Rouge La Goulue

그의 첫 번째 포스터 그림은 물랑루즈였다. 로트렉은 그의 첫 포스터인 'Moulin Rouge-La Goulue'를 제작한 후, 내 포스터는 오늘날 파리의 한 벽에 붙어 있다며 자랑스럽게 말하기도 했다. 이것은 그가 죽기 전 10년간 무수히 창조해낸 작품들 중 가장 위대한 작품 중 하나다. 이 포스터는 그의 예술에 광범위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1891년 물랑루즈의 가을 시즌 개막을 홍보하기 위해 제작한 포스터이다. 작품의 제목 중 '라 굴뤼 La Goulue'는 포스터 중앙에 있는 당시 물랑루즈의 인기 스타였던 무용수의 이름이다. 이 포스터를 통해 로트렉은 상업용 포스터 분야에서 주목을 받게 된다. 후에 몽마르뜨의 스타였던 제인 아브릴, 이베르 길베르 등의 공연 광고도 잇따라 제작하게 된다.

로트렉은 특히 일본의 우키요에 판화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했다. 판화에 영향을 받은 로트렉은 배경의 생략이나 선명하고 강렬한 색채, 굵고 진한 선 등을 활용해 10년간 석판화를 제작했고 이 포스터에서도 로트렉의 묘사한 정교하고 강한 윤곽을 볼 수 있다. 'Moulin Rouge-La Goulue'는 그의 첫 컬러 석판화였고, 로트렉은 자신의 포스터가 석판화로 제작되어 많이 보급되기를 원했다. 이 포스터는 이후 3천여장을 만들어졌고, 파리 곳곳의 길가에 붙어 사람들을 만났다. 이것은 요즘에도 흔히 볼 수 있는 길거리 포스터의 시초가 되었다. 

당시 사람들에겐 길거리에 붙어 있는 로트렉의 상업 포스터를 모으는 경쟁까지 생겼다고 한다. 이전에도 광고를 목적으로 한 포스터는 많았지만 로트렉의 물랑루즈 포스터는 단순한 광고 포스터를 넘어 상업성과 예술의 경계를 흐리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로트렉은 그래픽 아트의 선구자로 불린다. 이것은 현대의 영화, 연극 포스터들의 양식이나 현대 미술의 한 장르인 캘리그래피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침대에서 The Bed /flickr

침대에서 The Bed

이 그림에서 보이는 두 여자는 서로를 바라보며 누워 있다. 로트렉은 파리에 있는 매춘부들의 집을 자주 드나들었는데, 그저 맨몸으로 소파에 거리낌없이 제 몸을 뉘이는 여자들의 모습에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로트렉은 여자들 사이에서 맺어지는 관계에만 관심이 있는 게 아니었다. 누군가는 그것을 성적으로 볼 수도 있었지만 로트렉은 달리 그들을 섬세하고 유려한 부드러움을 묘사해 그림으로 그렸다. 

로트렉은 '침대에서 The Bed' 같은 여성간의 로맨스를 여럿 그렸지만 19세기 후반 문학과 예술에서 전형적으로 보이는 외설적이거나 에로틱한 접근법으로 다가가지 않았다. 이 그림도 레즈비언들이 낮에 있었던 일을 서로에게 하소연하며 지쳐 잠들기 전까지 실눈을 뜨고 서로를 위로하는 현실적인 모습을 그렸다. 로트렉은 영국에서 열렸던 오스카 와일드의 재판 내내 그의 친구 옆을 지켰던 일도 있었을 만큼 동성애자들에 우호적이었는데, 이 작품 이후 로트렉은 퇴폐 화가로 낙인찍히게 된다. 몽마르뜨에서 개최된 개인전에서는 경찰의 감시가 이어졌으며 강제 철거를 당하기도 했다.
 

물랑루즈에서 춤 At the Moulin Rouge The Dance /flickr

물랑루즈에서 춤 At the Moulin Rouge The Dance

로트렉은 파리의 지저분한 밑바닥에 주목했다. 이 그림은 마치 관중들의 틈에서 댄싱 홀 물랑루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엿보는 것 같다. 적당한 키를 가진 댄서가 치마를 무릎 위로 들어올리고, 건너편엔 한 남자가 여성 댄서를 상대하고 있다. '물랑루즈에서의 춤'은 남자 춤꾼이 붉은 스타킹을 신은 이 댄서에게 춤을 가르치고 있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파리라는 도시의 그림자를 관찰했던 로트렉은 이 그림에서 드가의 유명한 발레 묘사법을 참고했다. 중앙에 있는 무용수에게서 보이는 역동적인 모습은 나머지 군중들의 평온한 모습과 상대적으로 비교된다. 여성 무용수는 마치 조용한 군중을 배경으로 혼자 빙글빙글 도는 팽이 같은 모습이다. 로트렉은 댄스 홀 물랑루즈에서 일어나는 전형적인 퇴폐 문화나 음란함에 주목한 게 아닌, 어떤 편견이나 의도 없이 그저 화려한 이 밤문화를 관찰해 유려한 스케치로 표현했다. 
 

숙취 Hangover /flickr

이 그림은 자신이 운영하는 클럽에 로트렉의 작품을 전시했던 가수 겸 작곡가 아리스티드 브뤼앙이 그림의 제목을 붙인 것이다. 브뤼앙의 노래는 전형적인 도시 빈민들의 생활상이나 알콜 중독자들을 주제로 나오는 경우가 많았다. 이 그림의 모델은 로트렉과 2년간 파트너였던 수잔 발라동이다. 그녀는 입을 삐죽거린 채 눈을 반쯤 내리깔고 있다. 그의 모습과 테이블 위에 놓인 유리잔, 반쯤 비어 있는 와인병까지 그가 혼자 술을 마시고 있었던 걸 암시한다. 

'숙취 Hangover'는 취한 채로 반쯤 눈을 감은 채 카페에 앉아 있는 그를 통해 로트렉이 일종의 사회적 현상이었던 여성들의 알코올 중독을 묘사한 그림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반 고흐의 초상화 Portrait of Van Gogh /flickr

로트렉은 1886년 파리, 코르몽의 화실에서 고흐를 처음 만났다. 그때 로트렉은 스물 둘, 고흐는 서른 셋이었다. 내성적인 고흐는 언제나 조용히 화실에 앉아 있다 돌아가곤  했다. 다른 화가들은 고흐를 정신이상자라 수군거렸지만 로트렉은 고흐의 재능과 신념에 감동받아 그와 절친이 되었다. 둘의 나이 차이는 띠동갑에 가까웠지만 상관없었다. 남들과 다른 외모로 놀림받았던 로트렉이었지만 고흐에게 그는 그저 밥과 술을 잘 사주는 친구였다. 

이 그림에서 압생트 한 잔을 앞에 둔 채 고흐는 먼 곳을 응시하고 있다. 프랑스의 아를을 떠나기 전 고흐의 모습을 로트렉이 그림으로 담은 것이다. 고흐는 당시 로트렉을 친구로 생각하고 상당한 존경심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로트렉은 종종 동시대를 살았던 반고흐와 비교되기도 했다. 둘다 뛰어난 재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고흐는 가난과 정신적 불안으로, 로트렉은 절망적인 콤플렉스로 평생 고단한 삶을 살다 고흐는 권총자살로, 로트렉은 알코올과 매독으로 쇠해진 몸을 끝까지 방치해 소극적인 자살이나 다름없는 생을 마감했다는 것까지 유사한 점이 있었다. 참고로 두 사람은 묘하게도 같은 나이인 37살에 세상을 떠났다. 


장애를 뛰어넘어 예술을 만든 사람,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

두 사람의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렉 /The Richard H. Driehaus Museum

로트렉은 37세의 나이에 알코올 중독과 매독 합병증으로 사망한다. 그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한 말은 자신을 지독히도 싫어했던 아버지에게 하는 작별 인사인 '늙은 바보' 로 알려져 있다. 그의 죽음 이후 어머니는 아들의 작품을 전시하기 위해 박물관을 짓는 데 기부를 하기도 했다. 살아생전 로트렉에게 지지대는 어머니 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로트렉의 어머니는 그를 열심히 후원했고, 보나에게서 예술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어머니가 적극적으로 지원을 해주었기에 가능했다. 현재 툴루즈 로트렉 미술관은 로트렉의 작품들 중 가장 많은 수를 보유하고 있다. 

로트렉에게 그림에서 모델로 삼은 여자들을 이렇게 평했다. '모델은 일반적으로 인형에 불과하지만 이 여성들은 살아 있다. 신은 그들이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안다. 그들은 그저 소파에 동물처럼 몸을 뻗고 누운다. 뭔가를 요구하지도 않고, 자만에 차 있지도 않는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판화 및 그림 큐레이터인 코라 마이클은 그를 두고 '여자를 어떤 도덕적인 징표나 로맨틱한 영화의 주인공이 아닌, 단지 살덩이와 피로 이루어져 있으며 기쁨이나 슬픔을 여과없이 표현할 수 있는 사람으로 표현한다' 고 말했다. 로트렉에게 여성이란 특별한 의미를 담지 않은, 인간의 모양을 한 형상 그 자체였다. 

 

엘레스 Elles (portfolio cover)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3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로트렉은 700여점의 캔버스 그림, 350여점의 판화 및 포스터, 5000여점의 그림을 남겼다. 앤디 워홀처럼 후기 인상주의의 아이콘으로도 주목받은 그는 압생트에 젖어 있던 19세기 파리의 보헤미안 시대 그 자체였다. 불미스러운 장애로 놀림받았던 로트렉은 서커스 공연자, 매춘부 등 그 당시 하찮은 대접을 받았던 사람들과 같이 있을 때 안락함을 느꼈다.

로트렉은 귀족 출신답게 부르주아적인 생활을 하는 것이 아닌, 몽마르뜨의 자유로운 문화를 즐기며 사는 것을 선택했다. 나이트 라이프를 사랑했던 그의 삶은 수백가지의 작품들로 남아 지금도 사람들이 그를 추억하게 만들고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