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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축성기술의 비밀을 품고 있는 양주 대모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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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축성기술의 비밀을 품고 있는 양주 대모산성
  • 김서진 기자
  • 승인 2020.11.19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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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대모산성 /문화재청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양주 대모산성은 일명 양주산성이라고 부르며, 임진강과 한강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에 위치한 산성이다. 지어진 연대는 정확하지 않지만 7세기 초 삼국 시대에 지어진 산성으로 추정된다. 북서 방향의 유일한 통행로인 광적면 일대를 굽어볼 수 있는 교통의 요지이자, 의정부 쪽에서 오는 적을 방어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이기도 하다. 성 아래에는 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어 주변을 두루 살펴볼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고, 수락산의 봉수대와 봉화 교신이 되어 전략상 중요한 곳이었다.

양주 대모산성을 『삼국사기』,『세종실록』에서 매초성(買肖城)을 언급한 근거로 매초성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문무왕 15년(675년) 가을 9월 29일 당나라 장군 이근행이 군사 20만명을 거느리고 매소성에 주둔했는데 우리 군사가 공격하여 쫓고, 말 3만380필을 얻었으며 노획한 병기도 이만큼이었다.”(『삼국사기』)로 확인할 수 있으며, 조선 시대의 각종 사료에서 대모성산(大母城山), 대모산성(大母山城)의 기록으로 세종 시기의 군사 훈련지로도 예상된다. 그러나 요즘 학계에서는 연천 대전리 산성이 매초성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어 의견이 분분한 실정이다.


양주산성의 구조와 유적지의 의미 

9차 발굴조사에서 나온 유물 /기호문화재연구원

대모산성에 대한 성격 규명을 위해 성벽의 축조 상태 및 산성 내 건물지에 대한 발굴 조사를 1980년부터 1998년까지 7차례에 걸쳐 실시했다. 2008년부터 8차 조사를 시작해 최근 10차 발굴조사가 진행 중이며, 발굴조사 결과 토우와 삼국 시대의 각종 그릇, 활촉과 쇠낫, 도끼, 투겁창, 말재갈, 솥, 보습을 비롯해 청동거울과 청동말, 청동도장, 개원통보 등이 출토되었다. 또한 많은 종류의 기와조각도 발견됐다.

발견된 각종 농구류, 공구류 등을 통해 대모산성을 중심으로 그 관할지의 농업·수공업 관련 생산력이 높았고, 주변 지역에서 생산된 많은 농산물과 수공업품이 대모산성으로 집중되어 물류 거점의 역할도 했음을 보여준다.
 

양호하게 남아 있는 성벽 부근 /문화재청 

산성의 윗부분은 남북으로 이어진 중앙 능선을 중심으로 완만한 경사면과 평지가 이어지는 반면에 7부 능선 이하는 급경사를 이루고 있다. 산성 내부에는 비교적 넓은 평지가 있어 공간을 활용하는 데 편리했다. 성벽은 대부분 붕괴된 상태이지만 하부는 매몰되어 있어서 비교적 원형대로 남아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총 길이는 718m이며 이중 성벽이 양호한 구간은 130m 정도이다.
 

아직도 남아 있는 기와조각들 /양주시 공식 블로그 

축조 방식은 먼저 땅을 골라 다진 다음 위쪽으로 올라가면서 단을 만들어 들여쌓기 한 것으로, 경사각은 50도이다. 이런 방식은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주로 이용된 것으로 경주의 명활산성, 단양 온달산성, 적성 등에서도 나타난다. 지표에는 둥근 주춧돌 여러 개가 노출되어 있고 주변에는 지금도 많은 토기 조각과 기와 조각이 흩어져 있다.

높이 약 7.5미터 내외의 외벽을 쌓아올린 다음 그 외부에 삼각형 모양의 단면 형태를 띤 4-5미터 높이의 보축을 덧대어 축조한 우수한 축성술을 갖췄다. 사다리를 타고 오르내리는 현문식 성문 구조, 축조 당시의 모습을 잘 유지하고 있는 성벽 등 6-7세기 고대 축성 기술을 구체적으로 밝혀낼 수 있는 학술적 가치도 충분하다.

특별한 점은 건물지 밑 풍화 암반층 주변에서 발견된 반월형 석도 등 선사 시대부터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살았다는 걸 보여준다는 것이다. 산 아래 비옥한 평야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산 윗부분에 존재했던 언덕 도시의 형태는 경지 확보를 위한 투쟁 과정에서, 침략을 어렵게 하기 위해 언덕 위에 벽을 쌓고 집을 세웠다는 것을 알려준다. 따라서 이 유적은 고대국가 성립 전 단계에 있어 집단 간의 갈등과 그들의 방어 시설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양주산성의 성문들 

대모산성의 성문은 지금까지 3개소가 확인되었다. 모두 사다리를 타고 오르내리는 현문식 구조로 이성산성, 아차산성, 충주산성이나 왕검성 등 신라성에서 주로 발견되는 양식이다. 
 

북문지 풍경 /양주시 공식 블로그

북문지

북문지는 1980년 1차 발굴조사가 진행된 구간으로 성문은 해발 203미터 경사지형에 위치하며 성 외측에는 북문을 기준으로 계곡이 형성되어 있다. 성문의 형태는 현문식이다. 북문지 북측에서 백제 토기가 확인되었는데 이를 통해 신라가 이 성을 사용하기 전 백제 및 그 이전 문화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동문지 풍경 /양주시 공식 블로그

동문지

동문지는 1995년 6차 발굴조사가 진행된 구간으로 성문은 해발 200미터에 위치하며, 성문의 형태는 현문식이다. 6차 발굴조사 결과 토기류 123점, 기와류 8점, 석제품 5점, 철제품 110점, 청동류 3점 등 총 252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발굴 당시에는 동문지로 추정되었으나 문지의 위치로 볼 때 남문지가 타당하다는 주장도 있어 문지의 정확한 명칭을 위해서는 추가 조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서문지 풍경 /양주시 공식 블로그

서문지

서문지는 1998년 7차 발굴조사가 진행되었으며, 해발 185미터에 위치하며 성문의 형태는 현문식이다. 서문지의 경우 계곡부가 형성된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발굴조사 결과 배수로 시설이 확인된 것으로 보아 서쪽으로 많은 물이 흐르는 지형을 고려해 배수의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뚜껑, 대부완, 방추차 등 토기류 172점, 기와류 4점, 자기류 7점, 차관 등 철제품 136점, 청동류 8점 등 총 227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서문지에 올라가면 동서남북을 다 볼 수 있는데, 성을 쌓고 방어할 요충지로 적격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에도 대모산성의 과거를 계속 좇아서 

10차 발굴조사 전경 /기호문화재연구원

현재 진행 중인 양주 대모산성 10차 발굴조사는 양주시에서 추진중인 대모산성 종합정비계획과 연동하여 실시되었다. 2013년 사적(제526호)으로 지정된 이후에는 유적의 보존과 정비를 위해 종합정비 방안을 수립하고, 8~10차 발굴조사는 집수지 및 성벽의 축조 수법과 구조를 파악하여 향후 정비 사업에 활용한다는 목적으로 시행되었다. 이번 10차 발굴조사(750㎡)에서는 동문지 및 서문지 주변 성벽 2개 구간과 집수지 시설을 포함한 총 9기의 유구를 확인했다.

특히 대모산성 문지 중 동문지와 서문지 주변 성벽 2개 구간과 흐르는 물을 저장하는 집수지 시설이 이번 발굴조사로 확인되었다. 집수지는 서문지 성벽 구간과 함께 성 내부에서 가장 저지대(해발 180m)에 해당하는 서문지 주변 평탄지에 자리하고 있다. 집수지가 조성된 위치는 지하수와 빗물이 집중적으로 모이는 곳이며, 이와 같은 위치 선택은 용수를 확보하기 위한 1차적 목적 외에도 홍수 발생 시 수압과 토압이 직접적으로 성벽에 전달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출토 유물은 굽다리접시 토기 등의 토기류, 줄무늬(선문, 線紋)·격자문 평기와, ‘德部舍(덕부사)’, ‘富部(부부)’명이 새겨진 명문기와 등의 기와류, 화살촉, 철준, 차축할 등의 철기류가 확인되었다.
 

집수지 조사 중 전경 /기호문화재연구원 

이번 조사에서는 사례가 드문 평면형태 사각형, 단면형태 계단식의 집수지가 확인되어 더 특별하며, 집수지의 보수와 개축 흔적도 같이 발견되었다. 제한적인 범위긴 하지만 조사 성과로서 고대 석축산성의 구조와 축조 수법을 부분이나마 확인할 수 있었고, 이는 앞으로도 계속 추진할 종합 정비계획에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될 것으로 보인다. 양주시 또한 대모산성의 연차별 발굴 조사를 통해 체계적인 종합 정비를 위한 기초 자료를 확보하고, 유적의 경관 측면과 접근성도 개선해 시민들도 쉽게 탐방할 수 있는 유적지로 만들 예정이다.

다른 산성의 경우 삼국시대 성문은 조선 초기 이전에 모두 파괴되어 그 형태와 구조를 짐작하기 어려운 것들이 많다. 하지만 대모산성의 경우에는 조선시대에도 지속적으로 보수하고 사용해 측벽이나 바닥의 상태가 지금도 비교적 양호하게 남아 있다. 과거 삼국시대의 석공들은 이 산성을 짓기 위해 매일매일 대모산 정상을 오르내리며 굵은 땀방울을 흘렸을 것이다. 그들은 이제 사라지고 없지만 그 노력의 흔적들은 여전히 대모산 한 자락에 남아 후손들에게 소중한 역사의 한 장면으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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