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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위에 우뚝 선 화강암 도시의 낭만, 마추픽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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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 위에 우뚝 선 화강암 도시의 낭만, 마추픽추
  • 김서진 기자
  • 승인 2020.11.05 14: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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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추픽추 /flickr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1911년 7월 24일 아침, 예일대학교의 강사이자 탐험가인 하이럼 빙엄은 페루의 고대 잉카 유적에 대한 소문을 조사하기 위해 출발했다. 탐험가는 울창한 정글을 헤치고, 덩굴로 묶인 가느다란 통나무 다리를 기어갔으며, 독이 있는 뱀들을 피해 덤불 속을 살금살금 걸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 동안 정글을 헤매던 탐험가와 그 무리들은 우연히 풀로 덮인 오두막을 마주치게 된다. 거기에 살던 원주민들은 탐험가 무리에게 한 소년을 소개해 주며, 이 아이를 따라가라고 한다. 소년이 길을 안내하는 걸 따라가던 그는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고고학적 발견들 중의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 도시는 2007년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명명된 마추픽추였다.
 

빙엄이 마추픽추라 믿었던 이 곳은 빌카밤바였다 /flickr

사실 빙엄은 잉카 제국이 멸망할 당시 잉카의 통치차들과 스페인의 정복자들이 35년간 전투를 벌였었던, 잉카의 잃어버린 도시인 '빌카밤바' 를 찾아나선 길에 우연히 마추픽추를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빙엄이 처음 마추픽추를 발견했을 때 그는 그 유적지가 빌카밤바일 거라 굳게 믿었다고 한다. 그러나 잉카의 잃어버린 도시가 아닌, 새롭게 발견된 또다른 도시였다. 


숨겨진 공중 도시 마추픽추, 잉카인들의 생활

그렇다면 마추픽추란 도시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스페인의 침략, 점령에 대한 많은 연구가 있었던 때엔 막상 마추픽추에 관한 설명이 전혀 없었다. 아마도 침략자들이 그 곳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마추픽추는 잉카의 수도인 쿠스코에서 불과 80km 위치에 있었지만 스페인 정복자들은 어쩐 일인지 그 곳을 발견하지 못했다. 덕분에 다른 유적지들처럼 침략자들에게 약탈당하거나 파괴당하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그래서 마추픽추에는 다른 장소와 달리 신성함을 의미하는 구조물들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구름 속에 가려져 있는 마추픽추 /unsplash

또 마추픽추를 발견하기 힘들었던 건 "공중 도시"라고 불렸던 이유를 보면 알 수 있다. 페루는 수도 리마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도시가 안데스 산맥 고원 지대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특히 마추픽추는 산 꼭대기에 지어졌기 때문에 구름들이 산을 가리고 있을 때가 많아 산 아래에선 굳이 그 꼭대기까지 올라가지 않는 이상 도시 자체를 확인할 길이 없었다.

오랜 시간 동안 꽁꽁 숨어 있었던 마추픽추에 대한 정보는 미스테리로 남아 있는 게 너무나도 많다. 만든 목적은 고사하고 그 지역이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지금은 문서로 남아 있는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사람들은 이 잉카인들이 무수히 많은 건축물을 쌓아올릴 수 있었던 고도의 건축기술과 잉카인들의 생활상 등 전반적인 문화를 알아내려 노력하고 있다. 
 

마추픽추 /unsplash

잉카인들이 사용했던 케추아 어로 마추픽추는 ‘늙은 봉우리’라는 뜻이다. 마추픽추는 젊은 봉우리를 의미하는 우아이나픽추와, 늙은 봉우리인 마추픽추 봉우리 사이에 자리잡고 있다. 그럼에도 이 유적지가 마추픽추로 불리게 된 건 대부분의 유적지가 늙은 봉우리 아래 흩어져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고고학자들은 마추픽추가 잉카의 황제 파차쿠티의 소유지에 건설된 것으로 본다. 시카고 일리노이 대학의 안데스 문명 전문가인 브라이언 바우어는 이 마추픽추가 왕실의 소유지로 사용되는 동안 약 750명이 이곳에 거주했다고 한다. 바우어는 이 산이 아닌 호숫가 지역에서 만들어진 도자기도 발견된 걸 보아, 잉카인들만 마추픽추에 사는 유일한 사람들이 아닌 각기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이 곳에서 살다 죽었을 거라 예상한다. 

마추픽추의 모든 건축물은 산의 지형에 맞춰 건설되었다. 산 위부터 아래까지 웅덩이 하나 없이 산을 따라 자연스럽게 물이 내려가게 만든 수로 시스템은 지금도 물이 흐르고 있다. 벽에 설치된 돌계단은 그 주변의 여러 장소로 갈 수 있는 길이 되어 주었다. 광장을 중심으로 동쪽 구역은 경작, 주거지 목적으로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마추픽추에서 보이는 여러 산비탈(테라스)은 계단식 모양으로, 주민들은 이 경작지에 옥수수와 감자, 코카잎 등을 재배했고 알파카, 라마 등의 가축도 놓아 길렀다.  
 

마추픽추의 계단식 테라스 /flickr

마추픽추에서 대부분의 농업은 수백 개의 테라스에서 이뤄졌다. 이 테라스는 산 자체를 침식과 산사태, 홍수로부터 보호하면서 좋은 배수 및 토양의 비옥도를 보존하기 위해 지어졌다. 마추픽추엔 1450년 이후 매년 1800㎜ 이상의 비가 내렸다고 하는데, 강우량이 많아 테라스에는 관개, 즉 농지에 인공적으로 물을 공급하지 않았어도 됐다는 게 나중의 연구에서 밝혀지게 된다. 1990년대에 수행된 발굴 및 토양 분석에 따르면 테라스는 층층으로 지어졌고, 바닥층은 자갈로 덮인 큰 돌로 이루어져 있었다. 자갈 위에는 모래와 자갈이 섞여 있는 층이 깔려 있었고, 이 모든 것을 덮고 있는 풍부한 흙이 존재했다. 

그러나 16세기 후반, 잉카인들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문명이 발달한 이 마추픽추를 버리고 더 깊숙한 오지 어딘가로 떠나게 된다. 당시 스페인군도 발견하지 못했던 마추픽추를 잉카인들이 떠난 이유는 학자들마다 여러 추측이 있지만, 식량 부족으로 버려졌다는 가설이 제일 유력하다. 경작지가 750여명의 사람들을 먹여 살릴 정도로 넓지 않아 옥수수와 감자 등의 생산물도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그 가설을 뒷받침한다.
 

마추픽추의 건축물 /flickr

마추픽추 위에 세워져 있는 건물들은 종이 한 장 들어갈 틈도 없을 만큼 견고하며 이음새를 완벽하게 처리하는, 고전적인 잉카 건축 양식을 사용한다. 잉카인들은 돌의 치수를 재어 직육면체가 되도록 각 면을 다듬는 일명 '마름돌' 기법을 썼다. 잉카인들은 채석장에서 20톤이나 나가는 돌을 채굴해 일렬로 배열하고, 서로 딱 맞도록 모양을 만들어 건물을 세웠다. 가장 큰 돌은 높이 8.53m 무게 361톤에 달했다고 한다. 물론 이 커다랗고 무거운 돌들을 대체 폭탄이나 철제 도구도 없이 어떻게 작업해 옮겼는지에 대한 의문은 지금도 남아 있다. 1976년까지 마추픽추 건축물의 약 30%가 복원되었고 지금도 건축물의 복구 작업은 진행 중이다.


마추픽추를 상징하는 3대 구조물 

광장의 동쪽이 사람들이 주로 살았던 곳이라면 서쪽 지역은 종교적, 의례적인 목적으로 쓰였다. 마추픽추는 3대 주요 구조물이 유명한데, 태양 숭배의 용도로 쓰였던 인티우아타나, 태양의 신전 토레온, 그리고 '세 창문의 신전' 이다.  
 

인티우아타나 /flickr

인티우아타나 돌은 남아메리카에서 의식용으로 쓰이는 돌 중의 하나로,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유적이다. 넓은 바위 위에 기둥 모양으로 깎은 돌이 솟아 있는데, 케추아 어로 ‘인티’는 태양을 뜻하고, ‘우아타나’는 연결이란 뜻이라고 한다. 인티우아타나는 ‘태양을 잇는 기둥’, 종종 영어로는 '태양의 후예' 로 표현되기도 한다. 

동짓날이 되면 신관이라고 불리는 제사장이 등장해, 잉카인들이 숭배했던 태양을 잡아 이 돌에 묶는 의식을 치렀다고 한다. 즉 잉카인들은 밤새 태양이 사라지지 않도록 이 돌에 대고 제사를 지낸 것으로 추정된다. 

 

태양의 신전 /flickr

인티우아타나 아래쪽에는 중앙 광장이 있다. 이 곳에서 가장 눈에 띄는 곳은 말굽 모양으로 생긴 태양의 신전, 일명 토레온이다. 태양의 신전에는 2개의 창문이 있는데, 그 가운데 동남쪽 창문은 동짓날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이 창문을 통과해 비추도록 만들어져 있다. 태양의 신전은 태양의 후예라는 사실을 큰 자랑으로 여겼던 잉카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장소였다. 

커다란 바위 위에 부드러운 곡선으로 돌을 쌓은 탑 모습을 한 토레온은 잉카 건축의 전형적인 모습을 한 탑이다. 탑 아래는 방 한 칸이 바위 틈으로 보이는데, 이 곳은 태양신 인티를 숭배하는 곳으로 추정된다. 토레온 아래에는 커다란 바위 속 정교하게 만들어진 동굴이 있는데, 자연 동굴과 달리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모습을 하고 있어 왕이나 절대 권력자의 무덤으로 추측된다.
 

세 창의 신전 /tripadvisor

태양의 신전 북서쪽에는 '세 창의 신전'이라는 조금 특별한 이름으로 불리는 곳이 있다. 해가 뜨는 동쪽 벽에 3개의 창문이 있어 그런 이름이 붙었다. 그리스나 로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4개의 창이 있는 신전이 아닌 3개의 창이 있다. 이 창문은 각각 천국, 지상, 지하를 상징하는데 잉카인들에게 3이란 숫자는 꽤 큰 의미가 있다. 콘도르, 퓨마, 커다란 뱀은 각각 천국의 신, 지상의 신, 지하의 신을 상징한다. 세 곳의 신을 상징하는 세 가지 동물들은 잉카인들에게 자연 숭배의 대상이기도 했다. 

이 ‘세 창의 신전’에서 잉카 문명을 세운 시조이자 건국자인 망코 카팍이 태어났다는 설도 있다. 망코 카팍이 신하들에게 “내가 태어난 곳에 세 개의 창이 있는 석조 벽을 세우라”라고 명령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마추픽추는 더이상 버려진 도시가 아니다  

마추픽추 /unsplash

198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마추픽추는 페루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중요한 관광 명소 중 하나로, 지금도 전 세계의 관광객들을 불러모으고 있다. 2007년 전 세계 여론 조사의 일환으로 마추픽추가 현대 세계 불가사의 중 하나로 선정된 것은 잉카 세계의 중심지였던 마추픽추와 가장 가까운 도시, 쿠스코 사람들에게도 여러 가지로 축복인 일이었다. 마추픽추는 페루에게 국가적 자부심의 원천이자 귀중한 관광 명소 중 하나다. 하지만 국제적인 관심 또한 증가하면서 지난 시간 동안 세계가 몰랐던 이 도시를 보호해야 할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마추픽추는 1911년 발굴된 이후 2017년까지 141만1279명을 비롯해 지금도 이곳을 찾는 관광객이 늘고 있다. 1990년대 후반 페루 정부는 호텔, 레스토랑이 있는 관광 단지를 비롯해 유적지로 갈 수 있는 케이블카와 특급 호텔의 건설이 가능하다는 허가를 내리게 된다. 그러나 페루인과 외국의 과학자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방문객들이 너무 많이 몰리게 되면 이 유적지가 훼손될 것이라며 이 계획에 항의하기도 했다. 현재는 매년 수천 명의 관광객들이 페루 레일을 타고 마추픽추를 방문하고 있다. 

페루 당국은 지난 3월 코로나 19 대유행의 여파로 마추픽추를 폐쇄했다가, 8개월이 지난 현재 11월 1일부터 재개장 중이다. SNS엔 "마추픽추가 돌아왔다" 란 해시태그가 뜨기도 했다. 다만 재확산을 우려해 마추픽추 하루 관람객 수는 기존의 30% 수준인 675명으로 제한했다. 그러나 관광객들이 재개장 전날부터 이미 인근에서 대기하며 마추픽추의 관람을 기다리는 등 마추픽추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여전히 뜨겁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마추픽추에 관한 모든 진실이 밝혀지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과학자들은 마추픽추를 지금도 계속 발굴하고 재건해, 그 시간을 살았던 잉카인들의 모습을 다시 살려내려 노력중이다. 마추픽추에 꾸준히 지속되는 관심이 그곳에서 일어난 활동, 그리고 그 이후의 시간까지 밝혀내는 데 도움이 될 거라 과학자들은 믿고 있다. 잉카인들이 떠나고 혼자 남았던 외로운 도시는 이제 인류에게 몇 남지 않은 귀중한 문화 유산으로 변해, 매년 수많은 관람객들과 과학자들이 찾는 도시가 되었고 더이상 외롭지 않은 도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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