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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왕이 될 상인가?...어진(御眞) 속 왕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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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왕이 될 상인가?...어진(御眞) 속 왕들의 모습
  • 김서진 기자
  • 승인 2020.10.28 1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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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의 어진과 서양의 왕의 초상화의 차이
사실적 묘사로 최대한 인물과 비슷하게 기록해
권력과 위엄에 초점
영조의 어진 /문화재청 


[핸드메이커 김서진 기자] 왕의 초상화를 그린 '어진(御眞)' 은 단순한 그림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 어진은 왕 자신과 왕실의 권위를 실질적으로 나타내는 상징물이었으며, 특히 조선의 왕인 태조의 어진은 조선 왕실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그림이었다. 조선의 국왕들은 정치적 위기에 처하거나 나라의 기강을 다시 세워야 할 때, 태조의 어진을 새로 제작하고 봉안하는 일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다고 한다. 이렇듯 어진에는 그 사람에 대한 과거를 알 수 있는 많은 정보들이 담겨 있다. 지금을 사는 사람들은 과거에서 남은 어진을 보며 왕들의 실제 모습을 상상하고, 그때의 시대를 상상할 수 있으며, 옛 선조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도 예상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에 많이 만들어졌던 어진 

하동 경천묘 경순왕 어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실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 정식으로 남아 있는 어진은 없다. 조선 초기에 고려 시대의 흔적들을 지우는 작업이 전국적으로 일어나 역대 고려왕의 그림과 조각상 등이 불타거나 땅에 묻혔기 때문이다. 어진은 특히 조선시대 때에 많이 그려졌고, 어진을 그릴 때에는 궁의 최고 화가들이 모여 왕의 모습을 그렸다. 어진은 국가를 상징하는 의미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어진 제작을 위해서 많은 인원이 동원되는 일이 많았다. 우리나라의 어진은 뛰어난 사실적 표현이 유명한데 안색, 얼굴의 사마귀나 점, 검버섯 하나까지 확인할 수 있을 만큼 상세하게 그렸다.

조선시대의 어진, 초상화를 그릴 땐 배채법을 활용해 최대한 실물과 가까운 형태와 색감을 표현하였다. 배채법은 종이가 아닌 비단에서 가능한 기법이며, 반투명한 비단의 특성이 잘 드러나는 은은한 색감이 장점이었다. 비단은 물감의 얼룩이나 변색을 막아주는 데 효과적이고 얼굴과 피부의 미묘한 색을 내는 데 탁월했다. 어진을 그리는 데에도 이 기법은 널리 쓰였다. 지금의 우리들이 어진을 봤을 때 정말 이 왕들이 실재했다는 기분을 느끼게 해 주는 것도 이 기법 덕분이다. 

어진은 조선 시대 후기까지 활발히 제작되었으나 임진왜란과 6.25전쟁을 겪으며 대부분이 불에 타 없어진 걸로 추정되어 안타까움을 더한다. 그러나 화마를 피해 온전하게 남아 있는 어진도 있고, 다 소실되지 않고 남아 있는 몇 어진들은 지금도 복원이 진행중이거나 남은 것을 따라 그려놓은 모사작으로 남아 아직까지 현대의 사람들과 만나고 있다. 
 

태조 이성계 영정 /문화재청 

<조선 태조의 어진> 

태조가 살아있을 때 제작된 어진을 태조 사망 후 모사해 경기전에 보관했던 어진을 고종 때인 1872년 다시 모사한 어진이다. 모사한 후 원본은 파기해 경기전 뒷편 계단 밑에 묻었고 이 모사본을 경기전에 걸었다. 서울이 아닌 전주에 있었던 덕분에 6.25 전쟁 때 피난을 가지 않아도 되었고 화재 참사도 피할 수 있었다. 현존하는 어진 중 유일하게 훼손되지 않은 귀한 국보이다. 

푸른색 곤룡포를 입은 태조는 용상에 앉아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데, 곤룡포 속에 입은 포의 깃이 목 위로 바짝 올라와 있어 경건하고 엄숙한 느낌을 준다. 어깨와 가슴의 보 부분은 금박으로 처리하고 앞면은 광택이 과도하게 번쩍거리지 않게 처리한 후 채색하였다. 곤룡포는 오조룡보를 양 어깨와 가슴과 등에 달았다. 보에 수놓은 용의 발톱이 다섯 개라서 오조룡보라고 부른다.  

 

효령대군 영정 /문화재청

<효령대군 영정> 

효령대군은 태종의 둘째 아들로 세종대왕의 형이다. 그림은 황색의 관모를 머리에 쓰고, 붉은색 홍포를 차려 입고 의자에 앉아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코와 입술은 윤곽을 묘사하는 데 신경을 썼으나 수염의 표현은 그다지 세밀한 편은 아니며, 무언가를 잡고 있는 오른손의 형태도 완전히 보이진 않는다. 모자와 허리띠, 옷의 무늬 등에는 금칠을 하였다.

화면이 다소 거칠고 정교하지 못한 것은 조선 전기의 초상화에서는 보기 어려운 모습으로 여러 번 옮겨 그린 탓으로 보인다. 몇번 옮겨 그린 것이기는 하지만 조선 전기의 초상화가 거의 전해오지 않는 지금으로써는 가볍게 봐서는 안될 작품이다. 

 

원종 어진 /국립고궁박물관

<정원군(원종) 어진> 

어진을 그렸던 마지막 화가라고 전해지는 이당 김은호가 그린 임금 원종의 어진이다. 화면의 오른쪽이 화재로 소실되었으나 얼굴과 복식의 상당 부분이 남아 있다. 왕자군(임금의 서자)만 사용할 수 있었던 백택이라는 상상의 동물이 그려진 흉배가 달린 모자를 쓰고, 교의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 원종 어진은 17세기 초반의 공신들의 초상과 유사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1908년 여러 어진들을 경운궁으로 옮기는 조치가 취해지고 다시 1921년 창덕궁의 신선원전으로 어진들을 옮겨 모신 뒤, 1935년 당시 각각 1본씩만 있던 세조 어진과 원종 어진을 모사하는 작업이 시작되어 이듬해에 완료되었다. 이 때 어진 모사 작업은 순종의 어진을 여러 차례 그린 경험이 있는 화가 김은호가 담당했다.


 

고종 어진 /국립중앙박물관 

<고종 어진>

26대 왕 고종의 어진을 보면 익선관에 황색 곤룡포를 입고 용상에 정면을 향하고 앉아 있다. 인물의 얼굴은 콧등이나 이마 등 도드라진 곳을 밝게 보이도록 표현하였으며, 극세필의 붓질을 반복하여 피부의 결과 입체감을 표현하였다. 이전 시기 초상화에 비해 다소 왜소해진 몸의 표현과 사실적인 비율의 체구, 과장되지 않은 옷의 주름, 관복 윤곽의 표현은 20세기 이후 초상화의 특징이다. 

발이 놓여 있는 족좌대는 정면 시점이지만 그 아래 깔려 있는 화문석은 위에서 본 시점으로 그려 여러 시점이 한 화면에 공존하고 있는데, 이는 화가 채용신이 그리는 초상화의 독특한 표현 방식이다. 정해진 모습에 일정한 예를 갖춰 봉안되어 있는 어진이 이제는 다수의 사람들이 국왕을 경외하는 마음에서 두고 볼 수 있는 대상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서양의 '초상화' 에서 알 수 있는 왕들의 힘과 위엄 
 

헨리 8세 /flickr

17~18세기 바로크, 낭만주의 시절 왕의 얼굴을 그리는 궁정 화가는 그리는 대상이 대중이 아닌 왕이나 귀족 같은 높은 직위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림의 가치 또한 그 대상인 특정인의 입맛에 맞게 결정되었다. 즉, 그 사람의 마음에 들게 하려면 그림 속 인물이 훨씬 더 멋있고, 힘도 세고, 권위가 높은 것처럼 보여야 했다. 당연히 인물 그대로의 모습이 아닌 과장이 들어가거나 객관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자신들을 고용한 사람의 필요성, 즐거움을 위해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결과물도 그 사람들의 마음에 들도록 그리는 경향이 강했다. 아마 그 직위의 사람들은 후대의 사람들이 그림으로 자신들을 봤을 때도 똑같이 대단하다거나, 멋있다거나, 위대한 느낌을 받게 하길 원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헨리 8세의 4번째 왕비였던 독일의 앤 공주는 그녀의 초상화를 보고 반한 헨리 8세의 선택을 받아 결혼 준비를 위해 영국에 도착했는데, 앤의 실제 모습이 자신이 본 초상화와 달리 너무나 못생겼다고 생각한 헨리 8세가 이혼을 선언해 앤 공주는 6개월만해 파혼당했다는 일화도 있었다. 이렇듯 서양의 어진인 초상화는 사실적인 모습을 중요시했던 우리나라와는 많이 달랐다. 그러나 왕들의 초상화, '어진' 이라는 그 자체가 보는 사람들에게 왕의 권위와 위엄을 돋보이게 만드는 데 쓰였다는 점에서는 또 비슷한 면이 있다. 
 

루이 14세 /flickr

<루이 14세>

루이 14세의 대관식 초상화는 1701년 프랑스의 화가 이아신트 리고가 왕의 의뢰를 받아 그렸다. 루이 14세는 베르사유 궁전에 이 그림을 걸어두었고, 이 초상화는 후에 루이 14세의 "공식 초상화"가 되었다.

왕은 똑바로 서 있지만 왼쪽으로 3/4 정도로 기울어져 있으며, 머리를 낮게 하고 그의 발도 볼 수 있는데 이는 모두 계산된 포즈이다. 왕은 삼각형 모양으로 안정감 있는 그림의 정중앙을 차지하고 있다. 이 모습은 전통적으로 왕이 등장하는 모습이 없어도 그가 나타났다는 것을 의미하는 두꺼운 커튼으로 더 강조된다. 르네상스 시대 이후의 전통적인 힘과 안정의 상징인 큰 대리석 기둥이 왕의 모습을 든든하게 받치고 있다. 

푸른색의 백합꽃으로 수놓아진 왕좌 앞, 자주색(이 색은 고대부터 권력과 부의 색깔이었다)실크 캐노피 아래 있는 왕은 예복이나 휘장을 품을 필요가 없는 위엄을 자랑한다. 루이 14세는 사자처럼 생긴 가발을 쓰고 궁중 의복(레이스 셔츠와 커프스, 비단 스커트들, 다이아몬드 버클로 장식된 붉은 구두, 실크 가터 스타킹)을 입었다. 또 루이 14세는 그의 긴 다리를 강조하기 위해 어깨에 긴 왕실 코트를 걸쳤다. 

 

리처드 3세 /flickr

<리처드 3세>

영국의 수양대군이라 불리는 리처드 3세의 초상화에는 오른쪽 새끼손가락에 끼워져 있는 반지가 보인다. 누군가에는 그 반지가 제 친조카들을 잔인하게 죽였었던 본성의 증거로, 또 누군가에게는 사법 체계를 개혁하고 시민들을 보호하는 법을 만들었던 인간성의 증거로 여겨져 왔다. 

그의 표정은 종종 눈부시지만 거칠며 무자비하다고 해석된다. 셰익스피어를 비롯한 튜더 왕조 시기 사람들은 이처럼 리처드 3세를 의심이 많은 음흉한 야심가라며 부정적으로 묘사해 왔다. 이 이미지는 리처드 3세를 폐위시키고 튜더 왕조를 세운 헨리 7세를 정당화하려는 튜더 왕조의 열망에서 기인한다는 설이 있다. 리처드의 모든 그림은 그가 죽은 후에 완성되었으며, 1510년경 제작된 초기의 초상화들 중 몇 점은 리처드가 생전에 푸른 눈이었을 확률이 높고, 유년기엔 금발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찰스 2세 /British Library

<찰스 2세>

찰스 2세의 초상화는 그의 전속 화가 존 마이클 라이트가 1661년 4월 23일 스튜어트 왕정의 회복과 찰스의 대관식을 기념하기 위해 그린 것이다. 초상화에서 그는 레갈리아(왕이 공식 행사 때 입거나 몸에 지니는 왕권의 상징물)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다. 이 강력한 군주제의 상징은 찰스의 아버지 찰스 1세가 처형된 직후 사라졌다가 1661년 그의 대관식을 위해 부활했다. 

이 그림의 헨리 8세와 엘리자베스 1세가 그들의 권력, 정통성, 신성한 통치권의 시각적 표현을 보여주고 싶었던 공식 초상화와 많은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 찰스는 하얀 스타킹을 입은 두 다리를 넓게 벌린 채 국가의 캐노피 아래 왕좌에 앉아 있다. 이러한 세부 사항들은 특히 상징적인 그림이었던 "헨리 8세의 가족" 에서 헨리 8세를 연상시킨다. 이 초상화는 찰스 왕세자의 대관식 때 왕조의 부활을 사람들에게 상기시킴으로써 찰스의 정통성을 강화하려는 의미였다. 

 

조지 3세 /flickr

<조지 3세> 

조지는 프레드릭 가 왕자의 장남으로 영국에서 태어나 자란 최초의 하노버의 왕이다. 정신이상자라는 소문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그는 섭정 1811년까지 일에 대한 관심이 컸다. 그는 예술과 과학을 후원하며 농업에도 관심도 가졌었다.  

그의 대관식 초상화는 스코틀랜드 출신 화가인 앨런 램지가 맡았다. 소설가 호레이스 월폴은 램지가 그린 조지 3세의 대관식 초상화가 이전의 모든 그림보다 뛰어나다는 평을 하며 '이 그림엔 훨씬 더 풍부한 공기가 느껴지며, 왕이 대관식 때 입었던 예복 그대로 그려졌다. 금장식과 족제비 털로 이루어진 망토는 고도의 세심함을 자랑한다' 고 평했다. 당시엔 초상화 사본을 제작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램지의 화방엔 조지 3세 초상화의 26가지 버전을 완성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어진, 우리가 과거를 만나는 방법


조선시대에 수많은 어진이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온전히 볼 수 있는 게 얼마 되지 않는다는 점이 두고두고 안타까운 일이다. 그때 그려졌던 어진들은 수많은 시간을 보내고, 전쟁과 화재 등의 고난을 겪으면서도 꿋꿋이 버텼고, 반 이상 불타버렸어도 어진들은 오늘도 지금의 박물관에서 사람들과 만나고 있다. 과거에 존재했던 왕들을 지금의 사람들이 직접 만날 수는 없지만, 어진을 보며 사람들은 저마다 상상하고 고민하며 각각 자신이 생각하는 왕의 모습을 떠올린다. 

영조는 자신이 50세를 넘어서까지 살게 되리라고는 확신하지 못해, 그는 신하들에게 제 어진을 보일 때마다 마치 자신이라고 생각하며 제 업적을 기억해 주기를 당부했다고 한다. 영조에게 어진은 후손들에게 자신이 존재했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는 증거였고 자신이 죽어서도 후손들과 이어질 수 있는 방법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영조는 50이 넘어서도 30년을 더 살아, 10년마다 한 차례씩 어진을 그렸다고 한다. 후에도 사람들이 자신을 기억해 주길 바랬던 영조의 바람대로, 그림으로 남은 과거의 왕들은 현재의 사람들을 만나 오늘도 교감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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