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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웰빙과 건강식으로 자리잡은 '죽'요리, 다양하게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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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웰빙과 건강식으로 자리잡은 '죽'요리, 다양하게 만나다
  • 김강호 기자
  • 승인 2020.08.20 10: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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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물의 종류와 지역에 따라 다양해
아픈 현대사도 담고 있어
잣죽 / 위키피디아
잣죽 / 위키피디아

[핸드메이커 김강호 기자] 병원에 입원한 환자들이 많이 먹는 음식은 '죽'이다. 죽은 자극이 없고 제대로 씹지 않아도 흡수가 금방 되어 에너지를 빠르게 섭취할 수 있다. 또한 일반인들도 소화불량, 몸살이 있거나 숙취가 있을 때에 죽을 먹으면 좋다.

사실 오늘날에는 먹을 것이 풍족하기 때문에 굳이 씹는 맛도 없고 밋밋한 죽을 먹는 일이 많지 않다. 그리고 너무 죽만 먹게 되면 음식을 충분히 씹지 못하기 때문에 턱 근육과 소화력이 약해질 수 있다. 그래서 몸이 좋지 않을 때에만 가끔 먹는 것이다.

그런데 이 죽이 인류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원초적인 요리라고 한다. 특히 전근대 가난한 서민들에게는 쌀밥이나 면, 빵이 아닌 이 죽 요리가 오랫동안 주식이었다고 한다. 언뜻 생각하면 이해가 되지 않는다. 왜 씹는 즐거움 대신 밋밋한 죽을 주식으로 삼았던 것일까.

오랫동안 서민들이 주식으로 삼아온 음식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면, 밥, 빵 등을 만드는 것보다 죽을 만드는 방법이 더 단순하다. 죽은 각종 곡식을 물에 불리고 끓이거나 갈아 넣으면 된다. 따로 반죽하거나 굽고, 찌는 등의 과정을 거칠 필요가 없다. 또한 곡물을 죽으로 만들어야 양이 늘어나므로 가난한 사람들 입장에서는 가장 배부르게 먹을 수 있는 방법이다.

한국에서 가장 많이 재배한 곡물인 쌀로 만드는 흰죽은 서민들이 제일 많이 먹는 음식이다. 다만 맛이 매우 밍밍하기 때문에 여유가 있으면 고기와 야채, 해산물 등을 함께 넣어먹기도 한다. 하지만 여유가 없다면 흰죽을 그냥 먹거나 혹은 소금, 간장으로 간을 해서 먹었다.

죽은 일반식이 아닌 반유동식이라고도 한다. 액상처럼 흐르는 음식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더 액체에 가까운 음식은 유동식이다. 우리가 잘 아는 미음(米飮)은 보통 다른 죽이 재료에 5배의 물을 쓰는 것과 달리 찹쌀, 차조, 메조, 쌀 등 곡물에 물을 10배 이상 더 많이 넣고 푹 끓인 것이다. 걸쭉함이 훨씬 적어 환자, 아기가 먹는 용도 혹은 구황용으로 쓰였다.

쌀죽 이외에도 사용하는 곡물에 따라 조죽·찹쌀죽·팥죽·콩죽·율무죽·녹두죽 등이 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채소, 열매, 육류와 해산물을 넣은 호박죽·우유죽·닭죽·전복죽·잣죽·밤죽 등도 있다. 우리나라 죽 요리는 약 40여 가지가 된다.
 

전복죽 / 위키피디아
전복죽 / 위키피디아

선조들이 먹어온 다양한 종류의 전통 죽

'응이'는 걸쭉함과 입자가 일반 죽과 미음의 중간 형태이다. 원래는 율무를 이용한 죽을 의미했는데, 율무 외에도 멥쌀, 찹쌀, 차조와 메조 그리고 인삼과 대추 등 다양한 재료를 사용한 요리로 확대됐다. 이들 재료를 가루내서 물을 붓고 함께 쑤어서 만든다. 혹은 죽을 쌀 입자 크기에 따라 분류하기도 하는데, 쌀을 으깨지 않고 그대로 쑤는 가장 일반적인 죽인 '옹근죽', 갈은 쌀을 싸라기로 쑤운 '원미죽', 쌀알을 곱게 갈은 '무리죽'이 있다.

곡식과 밤 가루를 쑤어 만든 묽은 '암죽'도 전통적으로 먹은 죽이다. 이 암죽은 가난한 서민들이 모유가 부족할 때에 아이들에게 젖 대신 먹였다. 이렇듯 빈자들을 위한 죽이 있는가 하면, 귀한 재료를 넣은 홍합죽(담채죽)이나 전복죽 등 양반이 먹었던 죽도 있다. 매죽(梅粥)은 매화꽃을 넣어 쑨 죽인데, 맛보다는 선비들이 매화의 향에 취해 풍류를 즐기기 위한 죽이었다.

숭늉도 일종의 죽이라 할 수 있다. 밥을 지은 다음, 살짝 타서 바닥에 붙어있는 누룽지에 뜨거운 물을 부어 먹는 것이다. 이때 쌀의 전분이 구수한 냄새를 내고 소화효소인 덱스트린을 분비하여 소화를 촉진한다. 송나라 사신이었던 서긍은 고려인들이 숭늉을 물그릇에 넣고 가지고 다니며 마신다고 기록했다.

'범벅'은 감자, 고구마, 옥수수, 호박, 팥 등 다양한 채소와 곡물로 만드는 요리이다. 이들 재료를 푹 삶고 으깨서 밀가루 등 다른 곡물을 함께 섞고 물을 넣어 끓인다. 팥죽과 호박죽도 이들 팥범벅과 호박범벅에서 유래됐다. 단지 걸쭉함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렇듯 죽은 재료에 따라 조금씩 조리법이 다르고 지역마다도 다르다. 옥수수 범벅과 고구마 범벅은 강원도, 호박범벅은 경기도, 충청도 등에서 만들었다.
 

타락죽 / 위키피디아
타락죽 / 위키피디아

왕도 쉽게 마시지 못한 죽, 타락죽

보통 죽은 빈자나 환자가 먹는 음식이었으나, 워낙 그 역사가 오래되었고 보편화되어서 그런지 신분이 높은 계층이 먹는 죽 요리도 생겨났다. 사실 죽은 재료를 조리하는 방법 중 하나일 뿐이며, 더 중요한 것은 재료 자체에 있다. 죽도 들어가는 재료에 따라서 고급 요리로 바뀌는 것이다.

타락죽(駝酪粥)은 우유와 쌀을 함께 갈아 넣고 끓인 죽이다. 몽골에게 전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증보산림경제, 규합총서 등에서 조리법이 기록되어 있는데, 불린 쌀 혹은 찹쌀을 갈아서 체에 밭치고 물을 부어 끓이다가 죽이 퍼질 때쯤에 우유를 조금씩 넣어 풀어주고 소금 등으로 간을 한다.

타락은 우유의 옛 이름인데, 낙농업이 발전하지 못한 우리나라에서 우유는 접하기 어려운 음식이었다. 소가 귀한 자원이었던 것도 있지만 우유를 짜더라도 보관이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타락죽은 왕실과 일부 귀족만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다. 예로부터 조정에서는 아주 일부의 지역에서만 할당량으로 우유를 진상하게 했다.

고려에서는 우유를 조달하는 '유우소'라는 관청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조선에서는 동대문 근처 낙산(酪山)에 우유를 만들어 진상하는 왕실 전용 관청 소속 목장을 두었다. 낙산 목장에는 관원만 200명으로 궁궐에서 먹을 타락죽을 만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워낙 우유가 귀해 왕도 아프거나 특별한 날이 아니면 쉽게 먹지 못했다고 한다.
 

오트밀 / 픽사베이
오트밀 / 픽사베이

다양한 외국의 죽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의 여러 나라들이 죽을 먹었다. 쌀을 주식으로 삼은 일본과 중국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원래 흰쌀죽이 주식이었다. 일본에도 다양한 죽 종류가 있는데, 한국인에게도 익숙한 샤브샤브 요리에도 죽이 있다. 고기와 채소 등 전골 요리를 해먹고 남은 국물에 면이나 밥을 말아 죽처럼 만들어 먹는 것이다.

서양에서 먹었던 죽으로는 오트밀(oatmeal)이 있다. 원래 고대 로마인들은 거칠게 빻은 밀가루로 죽을 끓여 먹었는데, 이후 중세 유럽 농부들은 밀도 쉽게 먹을 수 없었다. 그래서 대신 가장 많이 재배된 곡물인 거친 귀리를 볶은 다음에 끓여 먹었다. 오트밀은 오랫동안 유럽 가난한 농부들의 주식이었다.

단순한 오트밀은 우리의 쌀죽처럼 별다른 맛이 없고 아주 거칠었다. 그래서 여유가 되는 한 여러 향신료를 뿌려 먹었다. 물론 현재는 오트밀이 건강한 웰빙 식품으로 각광받고 있다. 또한 오트밀에 다양한 과일과 견과류, 크림, 설탕 및 시나몬 등 향료를 뿌려먹는다. 곡물에 우유를 타먹는 시리얼도 오트밀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탈리아 요리 '리조또(risotto)'는 볶음밥 요리로 알려져 있지만, 죽에 더 가깝다. 버터와 쌀을 볶고, 뜨거운 물에 익혀 만든 요리이다. 오늘날에는 버섯과 치즈, 각종 육류와 해산물을 넣어 더 고급스러운 요리로 만들 수 있다. 또한 러시아인의 주식인 '까샤'도 메밀, 호밀, 귀리, 보리 및 우유와 버터를 섞어 끓인 죽이다. 칼로리가 높아 러시아인들이 추운 겨울을 보내는 데에 적합한 음식이다.
 

리조또 / 픽사베이
리조또 / 픽사베이

현대 죽의 활용

고려 시대 중기부터는 제철기술의 발전으로 무쇠로 만든 가마솥이 널리 보급되었다. 덕분에 서민들도 가마솥에서 손쉽게 쌀밥을 만들어 먹을 수 있게 되었다. 혹은 더 여유 있는 사람들은 쌀 등 곡물을 찌고 반죽하여 떡을 만들어 먹기도 했다. 이렇게 죽 대신 밥과 떡이 우리 민족의 주식을 대체하게 됐다.

하지만 죽의 역할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민중들이 언제나 쌀과 떡을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빈곤층은 여전히 죽을 먹었고, 일반 백성들도 흉작 등이 닥칠 때에는 죽으로 연명해야 했다. 6.25 전쟁 직후 먹었던 꿀꿀이죽은 미군 부대에서 먹고 남은 잔반과 음식물 쓰레기를 끓여 만든 것이다. 가슴 아픈 우리 현대사를 대표하는 음식이라 할 수 있다.

현대에도 죽의 역할은 사라지지 않았다. 앞서 이야기한 환자식 뿐만 아니라 건강을 위한 웰빙식품, 체중조절을 위한 감량 식품, 바쁜 현대인들의 식사 등으로도 유용하다. 서양에서는 가난한 농민이 먹었던 거친 오트밀이 부드럽고 맛있는 음식으로 변신해 직장인들의 중요한 아침식사가 되었다.

닐슨 코리아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도 상품 죽 시장이 2017년 720억에서 지난해에는 1400억으로 두 배 가량 커졌다고 한다. 현대적 감성을 담아 새롭게 탄생한 죽은 그 자체가 새로운 요리와 브랜드가 되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여러 죽 프랜차이즈 업체도 다양한 연령과 취향을 충족하는 고급스러운 죽을 내놓기도 한다.

가난의 상징이었던 죽 요리는 이렇듯 풍족한 오늘날에도 잊히지 않고 있다. 그리고 새로운 쓰임에 발맞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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