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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숫가루' 알고보니 전투비상식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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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숫가루' 알고보니 전투비상식량이었다?
  • 김강호 기자
  • 승인 2020.08.06 1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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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 풍부한 다양한 곡물을 가루낸 미숫가루, 보관쉽고 상하지 않아
오랫동안 전투비상식량으로 활용되었으며 현대에도 든든한 식사대용으로 인기
미숫가루 / 위키피디아
미숫가루 / 위키피디아

[핸드메이커 김강호 기자]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비상식량으로 필요한 것을 물으면 '라면'이 손꼽힐 것이다. 코로나 19 바이러스가 퍼지기 시작하면서 일부 지역에서 가장 먼저 사재기하기 시작한 것이 라면이다. 물론 이제는 한국의 방역 대처가 좋아졌기에 다른 미국, 유럽 나라들과는 달리 사재기도 줄어들었다.

라면이 저렴하고 열량이 높은 음식인 것은 맞다. 하지만 영양 면에서는 포화지방과 나트륨이 많아 그렇게 좋지 않다. 무엇보다도 물과 화력을 낭비하기 때문에 비상시에 그렇게 좋은 음식이 아니다. 차라리 통조림이나 건조식품, 레트르트 식품, 초콜릿 등이 무게와 조리의 간편함, 보관의 용이함에 있어 더 좋은 비상식량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비상전투식량으로 애용되는 미숫가루

그런데 건조식품 중에서도 곡물을 볶아서 가루 내서 만든 미숫가루는 다양한 곡물이 들어간다는 점에서 영양 면에서 훌륭하다. 가루 형태이다 보니 흡수가 빠르고 다양한 용기에 보관할 수 있다. 부피도 적고 잘 상하지 않아 장거리 이동과 보관에도 좋다. 그냥 먹어도 되지만 물이나 우유에 섞어서 마시면 더 빠르게 섭취가 가능하다.

곡식을 볶아서 가루를 내면 녹말이 호화가 되는데 물에 잘 섞이고 소화가 잘 되며 더욱 고소한 향미가 난다. 만드는 방법이 쉽고 간편해서 일반 가정집에서도 많이 먹는다. 섞을 수 있는 곡식도 찹쌀, 멥쌀, 보리, 콩, 율무, 누룽지, 깨 등 아주 다양하다. 또 여기에 설탕, 꿀 등을 함께 넣으면 달콤하게 먹을 수 있다.

미숫가루를 우리 고유 한식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사실 가루 낸 곡물을 우유나 물에 타마시는 방법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널리 활용됐다. 통조림 등의 다른 비상식량은 발명된 지 수백 년 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미숫가루는 훨씬 더 먼 옛날부터 피난민의 비상식량, 군대의 전투식량 등으로 쓰였다.

로마와 그리스, 중동 사람들은 멀리 이동할 때에는 보리와 밀가루를 자루에 휴대하고 다니면서 물에 타 마셨다고 한다. 에스토니아와 핀란드, 러시아 등 북유럽에서는 예전부터 카마(kama)라는 것을 먹었다. 카마는 보리, 호밀, 귀리, 완두콩의 가루를 혼합한 것으로, 우유 혹은 요플레를 곁들여 마시는데, 과일과 꿀을 함께 섞기도 한다.
 

북유럽, 동유럽에서 먹어온 카마 / 위키피디아
북유럽, 동유럽에서 먹어온 카마 / 위키피디아

중국과 몽골의 미숫가루

미숫가루를 가장 많이 활용한 나라는 중국과 한국이었다. 중국은 이미 기원전 1200년 전인 주나라 문헌에서도 미숫가루에 대한 기록이 보인다. 명나라의 전설적인 장군 척계광(1528~1588)은 기동성이 좋은 왜구를 상대하기 위해 미숫가루를 전투식량으로 삼았고, 척계광 군은 미숫가루 덕분에 식사 시간을 줄이고 빠르게 이동하여 왜구를 토벌했다고 전해진다.

6.25 전쟁 당시 중공군도 미숫가루를 전투식량으로 활용했다고 한다. 당시 중공군은 밀가루와 옥수수, 수수 가루에 소금을 약간 섞어 휴대했고 만주의 동북 3성에 2만 톤 이상의 미숫가루를 비축해두었다고 한다. 그리고 전쟁이 길어지자 마오쩌둥은 중국 전역에 미숫가루 생산을 지시했다.

특히 세계를 정복한 몽골군은 이 미숫가루를 중요한 전투식량으로 삼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고기를 주로 먹은 유목민인 몽골인이 원래 미숫가루를 먹은 것은 아니었다. 중국 혹은 고려에서 많이 먹어온 미숫가루가 몽골에도 전해진 것으로 보이지만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다.

몽골의 미숫가루는 '미스가라'라고 부르는데, 콩가루 등의 곡물에 물, 우유, 버터 등을 섞어 떡처럼 뭉쳐서 먹었다. 미숫가루와 단어가 비슷해 한국과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미스가라는 몽골인이 중동, 유럽, 북아프리카 등 멀리 떨어진 지역까지 진출하여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콩, 수수, 조, 기장, 팥을 넣어 만든 오곡 미숫가루와 미숫가루라떼 / 농촌진흥청
콩, 수수, 조, 기장, 팥을 넣어 만든 오곡 미숫가루와 미숫가루라떼 / 농촌진흥청

우리나라의 미숫가루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시대부터 미숫가루를 먹어왔다. 삼국유사에는 "진표율사가 불사의방에 갈 때에 쌀을 쪄서 말려 양식으로 삼았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를 미숫가루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신라 화랑들과 승려들도 몸과 마음을 단련하는 선식(禪食)으로 미숫가루를 먹었다. 우리나라는 미숫가루를 미식(糜食), 미수(米水)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렀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기근이 유행할 때 구황용으로 미숫가루를 백성들에게 내렸다는 기록이 자주 보인다. 또한 전쟁을 대비해서도 미숫가루를 비축해두었는데, 임진왜란이 끝난지 얼마 안 된 광해군 3년(1611년), 전라도 병마사 유승서가 각 군영에 미숫가루와 짚신을 넉넉히 준비하라고 지시를 내렸다가, 백성들이 전쟁이 난 줄 알고 피난을 준비하여 혼란이 일어났다.

조선 후기 실학자 홍만선은 저서 '산림경제'에서 미숫가루 만드는 방법과 효능을 설명했다. 책에서는 미숫가루를 신선이 먹는 음식인 천금초(千金麨)라면서 메밀가루, 꿀, 참기름, 감초 등을 섞어 시루에 찐 다음에 말리고 다시 가루를 내어 냉수에 타 마신다고 전한다. 특히 비단 주머니에 넣으면 10년을 보관할 수 있다고 했다.

홍만선은 계속해서 "한 번 실컷 먹으면 일주일을 굶어도 되며, 두 번을 먹으면 49일, 세 번을 먹으면 100일, 그리고 네 번을 먹으면 영원히 밥을 안 먹어도 얼굴이 좋아지며 초췌해지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물론 이 이야기는 과장된 것이겠지만 미숫가루에 대한 당대 인식이 어떤지를 보여준다.

이 밖에도 허준이 지은 '동의보감'에서 천금초를 먹으면 100일 동안 배고프지 않는다고 나온다. '임원십원지'와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이라는 문헌에서는 찹쌀을 볶아 가루를 내고 꿀물을 탄 것을 여름철에 마시면 갈증과 배고픔을 해결할 수 있다고 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조선시대 이후 만주에서 활약한 우리 독립군의 주요 전투식량에도 미숫가루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미숫가루를 오븐에 구워 쿠키를 만들 수도 있다 / pikist.com
미숫가루를 오븐에 구워 쿠키를 만들 수도 있다 / pikist.com
최근 식품에 불어닥친 뉴트로 열풍으로 기업에서 속속 미숫가루 관련 제품을 출시하고 있다 / 해태제과
최근 식품에 불어닥친 뉴트로 열풍으로 기업에서 속속 미숫가루 관련 제품을 출시하고 있다 / 해태제과

현대에도 유용한 미숫가루의 가치

현대에는 식생활이 풍족해지다 보니 미숫가루를 찾는 사람이 예전만큼 많지는 않다. 하지만 일부 직장인들에게는 간편한 식사 대용으로 쓰이기도 한다. 많은 기업에서 바쁜 직장인을 위한 미숫가루 제품을 출시하기도 하며, 카페에서는 미숫가루로 만든 오곡라떼나 빙수 등을 선보이며 고급 디저트로 활용하기도 한다.

굳이 미숫가루라는 이름을 빌리지 않더라도, 미숫가루의 원리는 여전히 유용하다. 쉐이크와 식사용 음료수, 간단한 바 형태의 음식도 영양가 높은 곡물을 볶고 빻아서 만들었기 때문이다. 현대 기술의 발전 덕분에 다양한 원료를 미세한 입자로 집약해서 첨가하는 제품도 많아지고 있다. 이렇게 보면 미숫가루는 미래를 지향하는 음식이라 할 수 있다.

아울러 미숫가루는 영양이 풍부해서 헬스로 몸을 만들고 싶은 사람들에게 보충제 대용으로 쓰인다. 헬스인들 사이에서는 '미숫게이너'라는 용어도 생겨났다. 또한 미숫가루에 들어있는 갖가지 곡물이 보습과 각질 제거에도 좋아, 미숫가루 팩이나 화장품으로도 만들어지고 있으니, 그 활용은 무궁무진하다.

본 기자 역시 미숫가루를 즐겨 먹는다. 가루와 물, 우유 그리고 설탕의 조합을 적절히 하고 덩어리지지 않게 잘 섞어야 식감과 맛이 좋아진다. 그래서 요령이 필요하다. 거기에 꿀과 다른 견과류, 크림, 인절미 등을 넣어 더욱 맛있고 고급스러운 나만의 요리로 변신시키기도 한다. 만드는 사람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미숫가루의 매력이 아닐까 싶다.

선조들이 가난을 이기고 재해와 전투에서 살아남고자 먹었던 미숫가루의 그 지혜는 오늘날에도 진가를 발휘한다. 미숫가루는 과거와 현대, 미래를 꾸준히 이어주는 음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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