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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의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 시대를 앞선 외설적인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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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의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 시대를 앞선 외설적인 예술
  • 김강호 기자
  • 승인 2020.07.14 11: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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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한 사생활과 외설적인 작품으로 많은 비판을 받아온 구스타프 클림트
작품의 내면에는 자유분방함과 실험적인 시도,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가 들어있다
'키스', 1907, 캔버스와 유화 및 금박 / 픽사베이
'키스', 1907, 캔버스와 유화 및 금박 / 픽사베이

[핸드메이커 김강호 기자] 이 작품은 아마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할 것이다.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의 1907년작 '키스'이다. 180x180cm의 거대한 크기에 그려진 절벽에 위태롭게 서있는 두 남녀의 에로틱한 키스가 보는 이를 사로잡는다. 키스는 단순히 물감과 붓으로 그린 그림이 아닌 정사각형의 얇은 금박을 붙여 번쩍이는 색감을 표현했다.

작품은 무엇을 말하고자 했을까. 사실 클림트는 자신의 그림에 대해 자세히 설명한 적이 없다고 한다. 자서전을 쓴 적도, 언론과의 인터뷰도 없었고 사생활도 철저히 숨겼다. 그의 작품은 오랫동안 외설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실제로 그가 죽고 14명이나 되는 사생아가 친자임을 주장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클림트는 '황금의 화가'라고도 불린다. 강렬한 황금빛을 자주 사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야기들로만 그를 평가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하고 단편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의 작품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좀 더 클림트의 생애와 작품의 변천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부르크 극장에 그린 프레스코벽화 / 위키피디아
부르크 극장에 그린 프레스코벽화 / 위키피디아

기존 예술에 대항해 수공예와 회화를 결합하다

클림트는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금세공업자이자 조각가였다. 아마 클림트의 작품에 자주 보이는 황금빛과 수공예 작업이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클림트는 빈 응용미술학교에서 회화와 수공예 장식을 공부했고 1883년에 졸업했다. 이후 동생 에른스트 클림트와 친구 프란츠 마치와 공방을 세우고 건축물을 장식할 그림과 모자이크를 제작한다.

세 예술가는 부르크 극장, 트란실바니아의 펠레스키 왕궁 등에 장식 그림을 작업했는데, 오스트리아 황제에게 훈장을 받을 정도로 재능을 인정받았다. 하지만 초창기 클림트의 작품은 평범한 사실주의 화풍이었다. 그러다가 클림트는 1892년에 동생과 아버지를 잃었다. 이때 큰 충격을 받고 3년 동안이나 작업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클림트는 다시 붓을 들기 시작했지만 그의 작품 세계는 급격히 바뀌어간다. 자유로운 성격에 자신감이 넘쳤던 젊은 클림트는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빈 미술가 협회를 벗어나 동료들과 빈 분리파를 창설한다. 빈 분리파는 순수미수과 응용미술의 분리를 넘은 총체적인 예술을 지향했으며, 미술을 통해 인간의 내면에 접근하고자 했다.

그들의 작품은 빈에서 주목을 받았다. '시대에는 그 시대의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보수적인 관념에 대항했다. 또한  부자들이 향유하는 회화에 가난한 사람들이 주로 했고 예술적으로 낮게 평가받는 수공예도 접목하여 부자의 예술과 빈자의 예술을 일치시키려고 했다.

 

'유디트 1', 캔버스에 유화 / 위키피디아
'유디트 1', 캔버스에 유화 / 위키피디아

외설적이라는 비판을 받으며 빈 분리파를 떠나다

빈 분리파는 계속 대규모 전시를 기획하여 주목을 받았지만, 클림트는 다른 멤버들과 갈등을 겪게 된다. 그 시작은 1901년에 그린 '유디트1'이였다. 구약성서의 주인공인 유디트를 표현한 그림이다. 하지만 그림은 신앙심 깊은 영웅적인 여성의 유디트가 아닌 가슴을 드러낸 음란한 팜므파탈의 모습이었다. 이 그림은 빈 분리파를 지원한 유대인 후원자의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1902년 클림트는 멤버들과 베토벤을 기리기 위해 전시를 기획했다. 멤버들은 각장 베토벤을 주제로 한 그림을 그렸다. 클림트는 베토벤의 합창을 모티브로 '베토벤 프리즈'라는 거대한 벽화를 천장에 그렸다. 벌거벗은 남녀가 천사들이 부르는 환희의 노래에 둘러싸여 끌어안는 모습, 수많은 여성의 누드와 기사 등이 등장한다.
 

베토벤 프리즈의 일부 / 위키피디아
베토벤 프리즈의 일부 / 위키피디아

이 그림은 독특한 구조와 실험적인 기법을 적용했다고 평가받지만 당시에는 너무 외설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1년 후 빈 분리파는 빈 대학의 천장 도안으로 '철학, 의학, 법학' 시리즈를 그렸는데, 클림트는 법학을 그렸다. 클림트는 여기에 나체의 임신부와 벌거벗은 사람들을 통해 인간의 불안정한 심리와 삶의 부조리를 표현했다.

하지만 대학에서 법학 그림이 외설적이어서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정했고 클림트와 멤버들의 갈등은 극대화됐다. 결국 그는 3년 후에 완전히 빈 분리파를 떠난다. 이제 클림트는 자유로운 개인 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이때를 황금 시기라고 하는데, '키스'와 그리스 로마신화에 등장하는 다나에를 표현한 '다나에'가 이 시기 탄생한 대작이다.

 

'스토클레 저택 벽화', 1903년 , 유리, 산호, 자개, 보석 등 귀한 재료로 추상적이며 이국적인 문양을 표현했다 / 위키피디아
'스토클레 저택 벽화', 1903년 , 유리, 산호, 자개, 보석 등 귀한 재료로 추상적인 문양을 표현했다. 또한 일본풍의 이국적 요소도 볼 수 있다 / 위키피디아
'아델레 블로흐-바우어 1', 캔버스에 유화 및 금·은박 / 위키피디아
'아델레 블로흐-바우어 1', 캔버스에 유화 및 금·은박 / 위키피디아

관능과 에로티시즘은 외설이 아닌 자유로움이다

클림트는 20세기 초에 유럽에서 유행한 자유로운 표현 양식인 '아르누보'를 대표하는 작가라고 한다. 하지만 아르누보를 넘어 독특하고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했다. 클림트가 추구했던 자유로운 예술은 아르누보는 물론 그 어떤 것에도 속박되어 설명할 수 없다.

클림트는 성과 사랑, 죽음, 에로티시즘을 다루는 것을 좋아했는데, 특히 여성 모델을 집착할 정도로 좋아했다. 클림트 작품들은 당시 보수적인 분위기에 맞지 않았으며 그가 죽은 후에도 50년 동안이나 대중의 관심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그는 세계적인 화가가 되었고, 그의 작품은 낭만적이며 인간의 육체가 주는 숭고함, 사랑과 자유의 열망을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키스'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복제품이 만들어졌다고 할 만큼,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또한 1907년 만든 '아델레 블로흐-바우어 1'은 2006년에 '피카소의 파이프를 든 소년'을 제치고 1350만 달러에 팔려 가장 비싼 그림이 되었다. (물론 경매 최고가는 몇 달 후에 잭슨 폴락의 '넘버 5'로 다시 갱신된다) 이 그림은 상류층 출신의 한 여인을 모델로 그렸고 유채화에 금박과 은박을 장식했다.

그의 생애는 난잡한 관계와 향락 속에 산 것 같지만, 그는 만나는 여성들을 육체적 관계와 정신적 관계를 갖는 것을 철저히 구분했다. 자유로운 만남 속에서도 진정한 사랑을 갈구했던 것이다. 하지만 끝내 클림트는 자신이 원했던 이상적인 배필을 구하지 못하고 독신으로 일생을 보냈다.

클림트의 예술은 그의 성격과 생애와 마찬가지로 도전적이고 실험적이었다. 새로운 기법과 표현을 중시함은 물론 서구인들에게 변방으로 취급받던 이집트, 일본, 중국의 미술도 적극 받아들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철학을 자세히 이해한 다음에 다시 그의 작품을 본다면 그 내면을 더 깊게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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