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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가 있는 그림, 풍속화를 개척한 '윌리엄 호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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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가 있는 그림, 풍속화를 개척한 '윌리엄 호가스'
  • 김강호 기자
  • 승인 2020.06.30 12: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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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와 만평의 선구자 호가스, 인간 본성에 대한 예리한 통찰을 그림으로 표현하다
유행 결혼(Marriage a la Mode)의 한 장면, 불륜을 목격한 남자는 아내의 불륜 상대의 칼이 찔려 죽는다 / 위키피디아
유행 결혼(Marriage a la Mode)의 한 장면, 불륜을 목격한 남자는 아내의 불륜 상대의 칼이 찔려 죽는다 / 위키피디아

[핸드메이커 김강호 기자]

18세기의 풍속, 정략결혼을 표현한 한 그림

한 문화권의 그리고 그 시대의 사회에는 풍속이라는 것이 있다. 풍속은 그 사회를 대표하는 생활 전반의 관습을 말한다. 그중에서 먼저 결혼을 보자. 결혼 풍속은 시대마다, 문화마다 달랐다. 결혼은 우리 삶의 결정에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이지만, 요즘에는 결혼을 아예 피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결혼을 자신의 인생에 부정적인 요소로 생각하는 것이다.

결혼으로 인해 인생은 긍정적일 수도 있지만 부정적으로 바뀔 수 있다. 그런데 지금은 결혼이 선택이 됐지만, 예전에는 사랑하지 않는 사람끼리 강제로 결혼해야 했던 정략결혼도 많았다. 여기 이 18세기 영국의 풍속화를 보자, 이 그림의 제목은 '유행 결혼'이다. 여섯 장면으로 구성됐는데, 장면이 넘어갈수록 만화처럼 줄거리가 자연스럽게 전개되어 나간다.

그림에서는 부유한 상인 계층이 자신의 딸을 몰락한 귀족 출신 집안의 아들과 결혼시킨다. 상인은 신분을 상승시키고, 귀족은 경제적 도움을 받기 위해 자식을 희생시킨 것이다. 하지만 결혼 당사자들은 서로 사랑하지 않았다. 결국 여자는 바람을 피우고, 남자는 아내의 불륜 상대인 변호사의 칼에 찔려 죽는다. 결국 변호사는 사형당하고 남겨진 여자는 음독자살로 생을 마감한다는 비극적 결말로 끝난다.

막장 드라마 같은 내용이지만, 그림은 그 시대에 실제로 만연했던 일을 표현한 엄연한 풍속화이다. 이 그림을 그린 작가인 윌리엄 호가스(William Hogarth, 1697~1764)는 그림 곳곳에 다양한 상징과 묘사를 넣어 귀족의 사치와 허영심 그리고 상류층의 부도덕성을 신랄하게 풍자했다.
 

판화로 찍은 매춘부의 편력(A harlot's progress)의 한 장면 / 위키피디아
판화로 찍은 매춘부의 편력(A harlot's progress)의 한 장면 / 위키피디아

영국 사회의 이면을 신랄하게 표현한 윌리엄 호가스

풍속화는 그 시대 사람들의 생활을 알 수 있게 해주는 가치 있는 자료이다. 그리고 윌리엄 호가스는 영국의 풍속을 알 수 있는 다양한 풍자화와 풍속화를 그렸다. 우리나라의 풍속화의 대가라면, 단원 김홍도(金弘道, 1745~1806)를 떠올릴 수 있는데, 흥미롭게도 이 둘은 나름 동시대 사람이었다.

윌리엄 호가스는 런던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가게가 파산하면서 호가스는 어릴 때부터 가난에 시달렸다. 하지만 예술에 뜻이 있어 금·은세공사의 도제가 되었고, 판화와 삽화 기술을 익혔다. 하지만 이후에는 더 예술적인 회화를 하고 싶은 마음에, 1720년대에 귀족 던힐에게 소묘를 배웠다. 그리고 그의 딸과도 결혼하게 되었다.

그렇게 여유를 얻은 호가스는 전에는 단지 돈벌이를 위한 그림을 그렸지만, 이제는 당대 사회를 풍자하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1732년에 그린 '매춘부의 편력'은 시골에서 살다가 도시로 돈을 벌기 위해 온 한 여성이 창녀가 되고 비참하게 살다가 죽는 내용을 다뤘다.
 

'탕아의 편력(The rake's progress)'의 한 장면, 주인공이 매춘부들과 바탕하게 놀고 있다 / 위키피디아
'탕아의 편력(The rake's progress)'의 한 장면, 주인공이 매춘부들과 방탕하게 놀고 있다 / 위키피디아

1735년에 그린 '탕아의 편력'은 8점의 유화로 구성되었다. 줄거리는 한 젊은 호색가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재산을 유흥과 도박 등에 흥청망청 탕진하고 방탕하게 살다가 결국 정신병원에 갇힌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1743년에서 45년 사이에는 아까 설명했던 '결혼 풍속'을 그렸다.
 

'진 거리(Gin lane) / 위키피디아
'진 거리(Gin lane)' / 위키피디아

1751년 그린 '진 거리(Gin lane, 1751)'는 독한 술의 사회적 폐단을 묘사한 그림이다. 당시 영국 의회에서 진 종류의 독한 술을 금지했고 호가스도 이 법령을 지지했다. 한 공간에 다양한 사건으로 채워진 이 그림은 구도의 통일과 시간의 연속을 동시다발로 보여준다.


만평과 만화를 대량인쇄하여 새로운 회화의 길을 제시하다

호가스의 풍속화는 꽤 많은 인기를 끌었다. 단순한 그림이 아닌 줄거리가 담긴 여러 그림을 시리즈로 구성시켰기에 재미가 있었다. 또한 기존 다른 회화 작품처럼 종교적이거나 이상적인 주제가 아닌, 당시 사람들의 애환을 직설적으로 풍자했던 현실적인 그림이었기에 공감을 얻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호가스는 이후에도 계속 이 편력 시리즈들을 보강해 새로운 개정판을 출판하고 신문 잡지에 싣기도 했다. 오늘날의 만화와 만평, 일러스트레이션의 시초가 된 것이다. 그의 그림은 나란히 놓아 차례대로 편하게 볼 수 있게 했고, 글을 모르는 사람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호가스는 "나는 그림의 주제를 극작가처럼 다루려고 노력한다. 캔버스는 나의 무대이다. 그림의 주인공들은 대사 없는 연극을 몸짓과 태도로 연기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그림으로 계속 사업을 진행했다. 처음에는 풍속화를 유화로 그리다가, 이제 자신이 배웠던 판화 기술을 이용해 동판화로 찍어 대량 인쇄했다.

그런데 호가스의 그림이 인기가 많아지자 도용과 복제도 성행했다. 호가스는 정치인들을 움직여 1735년, 최초의 저작권법인 호가스법(판화가의 저작권 법령)을 만들었다. 이 법 덕분에 다른 다양한 미술가들도 저작권 보호의 혜택을 볼 수 있게 됐다. 호가스는 누군가를 베끼지 않는 것이 진정한 예술의 길이라 생각했는데, 자신과는 달리  계속 모방을 일삼는 사람들을 보고 못마땅해 했다.
 

선거 운동원 접대(An Election Entertainment) 1754년 영국 옥스퍼드 주 선거를 풍자한 그림이다. 당시 영국은 투표소가 별로 없어 투표를 위해 멀리 여행해야 했고, 선거 출마자들은 이들을 접대해야 했다 / 위키피디아
'선거 운동원 접대(An Election Entertainment)', 1754년 영국 옥스퍼드 주 선거를 풍자한 그림이다. 당시 영국은 투표소가 부족해 투표를 위해 멀리 여행해야 했고, 선거 출마자들은 이들을 접대해야 했다 / 위키피디아

예술과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로 탄생한 호가스의 예술

당시 영국은 유럽에서도 가장 강한 나라로 성장했지만 예술에 있어서는 아직 불모지와 같았다. 영국인들은 유럽 대륙의 수많은 예술품을 수입했고 작품 의뢰도 외국 작가에게 맡기곤 했다. 이는 회화도 마찬가지였다. 수많은 영국 화가들이 활동했지만 그들은 유럽 대륙의 우아한 화풍을 따라 하기만 하는 아류에 불과했다.

17세기 이후, 영국은 독재자 올리버 크롬웰이 종교 미술을 금지하면서 그 명맥이 끊겼다. 하지만 신화를 소재로 하는 르네상스 그림들도 영국인의 취향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아주 단순한 초상화만이 성행하여 회화의 수준과 폭이 좁아졌다. 호가스는 외국 거장의 그림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숭배하는 사람들을 경멸했고, 단순한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들도 싫어했다.

호가스는 다른 외국 스타일을 모방하지 않았고, 풍속화와 풍자화라는 자신의 독특한 화풍을 개척하였다. 호가스 이전에는 영국을 대표하는 별다른 화가를 꼽을 수 없었지만, 윌리엄 호가스의 탄생으로 영국 미술의 위신이 서게 됐다. 그의 작품은 영국 뿐만 아니라 유럽 전국에 명성을 떨쳤고 서양 회화 역사에도 영향력을 남기게 됐다.
 

윌리엄 호가스의 자화상 / 위키피디아
윌리엄 호가스의 자화상 / 위키피디아

호가스는 자신이 모은 돈으로 '호가드 아카데미'와 공공미술관 등을 설립했다. 그는 사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단순한 사업가가 아니었다. 그의 그림의 목적은 돈이 아닌 영국 대중들의 의식을 깨우치고, 열등감에 휩싸였던 영국 미술의 새로운 길을 제시하기 위함에 있었다.

호가스는 1753년 '미의 분석'이라는 논문에서 기존 고전주의를 논박하고 영국 회화의 특징을 강조했다. 그리고 1757년에는 국왕 조지 2세의 궁정화가가 되었으며, 화가로서는 처음으로 '경(SIR)'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이렇게 최고의 명예와 부를 거머쥐었지만, 이후에도 계속 영국 미술의 발전에 힘썼고 1764년 세상을 떠났다.

호가스는 "라파엘로 같은 그림 작가가 되느니 범죄자의 행로를 그리러 다니겠다"라고 말했다. 얼마나 그가 기존 관습과 모방을 반대하고, 자신의 그림 철학에 자부심이 있었는가를 알려주는 말 같다. 호가스의 예술은 조국의 예술을 바꿔보고자 했던 애국심 그리고 자신의 주변을 살아가는 수많은 민중들에 대한 애환, 인간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으로 탄생한 것이다.

그림을 통해 인간 본성에 대한 예리한 통찰력을 보여주어 새로운 회화의 길을 제시한 호가스, 오늘날에도 그의 흔적은 깊숙히 스며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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