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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 선박 ②] 곡식을 나른 '조운선'과 임진왜란에서 활약한 '판옥선'과 '거북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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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 선박 ②] 곡식을 나른 '조운선'과 임진왜란에서 활약한 '판옥선'과 '거북선'
  • 김강호 기자
  • 승인 2020.06.09 11: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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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선도본에 실린 조선의 조운선 /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각선도본에 실린 조선의 조운선 / 위키피디아,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고려의 수운선이었던 마도1호선 복원 그림 / 문화재청
고려의 수운선이었던 마도1호선 복원 모형 / 문화재청

[핸드메이커 김강호 기자] 세금으로 내는 곡식인 세곡 또는 각종 특산품을 바다, 강가, 하천을 통해 수도로 운송하는 '조운(漕運)'은 고려 시대부터 활발히 시작됐다. 화폐경제가 활발하지 않은 조선 중기까지 조운은 국가의 재정수입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렇다면 조운을 나르는 선박인 조운선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세곡을 나르는 운송 선박, '조운선'

초마선(哨馬船)은 고려시대부터 조선 초기까지 사용된 조운선이다. 원래는 군선으로 사용하던 것을 바꾼 것인데, 최대 1000석의 곡식을 실을 수 있으며, 길이 약 20m, 너비 7m의 큰 배였다. 물론 조운창마다 드나들 수 있는 배와 적재량이 달랐다. 예를 들어 충주의 덕흥창은 평저선 20척, 세곡 200석, 각 해운창은 초마선 6척, 세곡 1000석으로 제한됐다.

초마선은 완도에서 출토된 고려의 선박을 토대로 그 모습을 추정해볼 수 있다. 다른 한선과 비교하면 곡식을 더 많이 실을 수 있도록 널쪽을 늘리고 선창도 더욱 깊이 만들었다. 밑바닥은 통나무로 되었고, 이물비우와 고물비우는 넓적한 판자로 가로막았다.

조선 세조부터는 맹선(猛船)이 등장했다. 세조 때 병조선(兵漕船)이라고 불렸던 이 배는 신숙주가 군용과 조운용을 모두 겸하는 배를 만들자고 주장하면서, 일본과 중국의 배를 모두 연구해보고 만들었다. 병조선은 성종이 편찬한 '경국대전'에서 맹선으로 명칭이 바꿨는데, 대맹선은 80인, 중맹선은 60인, 소맹선 30인이 탑승이 가능했다.

하지만 맹선은 초마선의 형태를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이었다. 그래서 전투에서는 막상 작고 빠른 일본 배를 추격하는 데에 큰 소용이 없었고, 결국 조선 명종 때에 판옥선이 개발되면서 맹선은 완전히 조운용으로만 한정됐다.
 

판옥선 그림 / 위키피디아
판옥선 그림 / 위키피디아

조선의 주력 전함, '판옥선'

다른 한선의 종류는 잘 모른다고 해도 임진왜란 때에 맹활약한 조선의 주력함인 '판옥선'과 '거북선'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인지도 있는 선박이다. 이순신 장군이 이 판옥선과 거북선으로 일본군을 무찌르는 장면을 대중 미디어에서 수없이 다뤄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배들이 어떤 배인지는 자세히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판옥선은 명종이 1555년(명종 10년) 일어난 을묘왜란에서 기존 맹선이 전투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새롭게 개발한 것이다. 판옥선은 기존 평저선에서 네 귀에 기둥을 세우고 방패판을 두른 다음 다시 갑판을 깔고 난간을 두른다. 그리고 그 위에 지휘소인 2층 누각을 세웠다. 갑판이 2층 구조여서, 1층에서는 노를 젓고 위의 갑판에서는 군사들이 전투에 임했다.

판옥선은 주로 소나무를 이용했다. 소나무는 한국 건축에도 필수적으로 쓰이는 재료이며 국가가 직접 전국의 소나무 숲을 관리할 정도로 중요했다. 소나무로 만든 판옥선은 참나무, 전나무를 주로 사용한 일본 군함(세키부네)에 비해 강도와 내구성이 강해 난전과 육박전에서 위력을 보여주었다.

또한 125명의 군사가 탑승할 수 있었고, 쉽게 각종 중화기를 함께 장착하여 전투력을 극대화했다. 일본 배는 빠르고 작은 첨저선 형태였는데, 회전이 서투르고 반동이 강해 대포의 위력이 떨어졌다. 반면 판옥선은 느리지만 더 견고하고, 이동과 회전도 안정감이 있었기에 이순신 장군이 이를 적극 이용해 학익진 등 전법도 구사할 수 있었다.

일본군의 장기인 적선에 올라타서 싸우는 백병전도 올라타기 쉽지 않은 구조인 판옥선에서는 위력이 반감됐다. 판옥선은 물살이 거세고 좁은 한국 연안에서는 최고의 군함이었다. 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에서 겨우 12척의 배로 133척의 일본 수군을 이길 수 있었던 것도 판옥선의 장점과 그 장점을 더욱 극대화할 수 있는 울돌목으로 일본군을 유인한 덕분이다.

판옥선은 전쟁이 한창이던 1593년에는 보유량이 200척까지 이르렀다. 전쟁 이후에는 전선(戰船)으로 이름이 변경되었다. 또한 이후에는 200명의 병사가 탑승할 수 있을 정도로 커졌으며, 조선 후기까지도 계속 주력 함선으로 유지되었다.
 

이충무공전서에 나오는 거북선 그림 / 위키피디아
이충무공전서에 나오는 거북선 그림 / 위키피디아


거북선의 구조, 끝나지 않은 논쟁

거북선이 사실 이순신 장군이 처음 만든 것은 아니라고 설도 있다. 훨씬 전인 태종실록에 처음 거북선이 언급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180년이라는 시간 격차와 이후에도 선박 기술이 계속 발전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자료가 부족해서 단정할 수는 없어도 임진왜란 때의 거북선과 꼭 같은 것으로 보기도 어렵다.

전해지는 이야기에서는 나대용(1556~1612)이라는 이순신의 군관이 거북선을 만들었다고도 한다. 하지만 나대용 혼자서 거북선을 계획했던 것으로 보이지 않고, 이순신도 그 과정에 참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실제 제작과 전투에서 거북선을 투입하는 최종적 결정을 내린 것도 이순신이다.

거북선은 그 독특한 이미지 덕분에 해외에서도 많이 알려진 선박이지만, 그 구체적 구조에 대해서는 다양한 주장이 있다. 시대마다 모양이 달랐다고 보기도 한다. 정조 때 간행된 '이충무공전서'에 대략적인 수치와 그림이 나오긴 하지만,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2층인가 3층인가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었는데, 현재는 3층 설을 지지하는 학자가 더 많다. 또한 반 3층 설, 단면 8각형설도 나오고 있다. 확실한 것은 거북선의 구조는 일단 기본적으로는 판옥선과 동일하며, 크기도 비슷하다는 것이다. 판옥선의 형태에 다시 덮개를 씌우고 칼과 창을 달았으며 거북 머리를 설치했다.

거북선은 돌격선 역할을 하며 적의 대열을 흐트러트릴 수 있었다. 사면으로 대포를 쏠 수 있었고 겉에는 옻칠을 하여 불로부터 배를 보호하다. 하지만 철판을 두른 철갑선이었는가에 대해서는 국내외적으로 많은 주장과 논쟁이 있으나, 정확한 거북선의 실체를 알기 위해서는 침몰한 거북선이 발견되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서울전쟁기념관에 전시된 거북선 모형 / 위키피디아
서울전쟁기념관에 전시된 거북선 모형 / 위키피디아

지금까지 고려와 조선의 수많은 배를 살펴보면서, 당시 우리 민족이 얼마나 우수한 배를 건조했는지 알 수 있다. 고려의 배는 중국에서도 인정할 정도로 뛰어났고, 조선의 거북선과 판옥선은 일본 배가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수준이어서 왜군을 공포에 몰아넣었다.

물론 우리나라의 배는 멀리 바다로 뻗어나가기보다는 주로 연안에서 운행되는 배에 치중되었다. 한편으로는 우수한 배들이 있지만 바다로 멀리 진출한 해양강국이 아니었다는 점이 아쉽기도 하지만 오히려 그러한 점 덕분에 우리나라를 침략한 일본 배들이 연안에 적합한 우리 배들에게 패배 했을 지도.

또한 당시 조선이 멀리 바다를 항해해야 할 동기는 마땅히 없었다. 그러나 수운로를 활발히 이용했던 덕분에 사람들은 배를 만들 때에 우수한 손재주와 아이디어를 뽐낼 수 있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필요와 동기만 있었다면 얼마든지 뛰어난 것을 만들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만약 한국인들이 해양 진출을 할 필요를 느꼈다면, 어떤 뛰어난 대양 항해선이 만들어졌을지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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