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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 선박 ①] 중국도 부러워한 고려 전함, 우리의 고유한 선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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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전통 선박 ①] 중국도 부러워한 고려 전함, 우리의 고유한 선박
  • 김강호 기자
  • 승인 2020.06.02 10: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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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타기를 생활화한 우리 민족, 중국·일본과 다른 형태의 한선(韓船) 발전시켜
고유한 한선 특징은 고려 시대부터 정립돼··· 튼튼한 배로 이웃나라도 부러워해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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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메이커 김강호 기자] '고즈넉한 강가에서 나룻배를 타고 노를 젓는 사공, 그리고 유려한 산기슭을 바라보며 풍월을 읊는 선비···' 사극에서는 아주 익숙한 풍경이다. 한국인에게 배 타기는 아주 익숙한 생활 문화였다. 한국 국토의 대부분이 산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아주 잘 알려진 사실이다. 옛날에는 산에 맹수와 산적이 들끓었기 때문에 평범한 사람들이 산을 타고 어딘가를 이동하기는 너무 위험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육지로 이동하기보다는 주로 강과 바다에서 배를 타고 먼 거리를 이동했다. 이러한 배타기 문화는 심지어 50~60년대 우리 할아버지·할머니 세대까지도 흔하게 볼 수 있었다. 배는 한국인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이동 수단이었다.

수운 이동이 발달한 우리나라

고려와 조선에는 특히 하천과 강으로 사람과 물건을 운송하는 조운이 발달했다. 세곡 등 조세도 대부분 수운로를 이용해 날랐다. 한양 근처에 광나루와 양화진까지의 물줄기인 경강이 있었는데, 이 경강을 중심으로 시장이 발달하였다. 경강 일대에 전국의 물건이 모였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경강 시장은 전국 해운의 중심이 됨은 물론 온갖 물건의 물가를 결정했다.

'열하일기', '허생전' 등을 쓴 조선 후기의 실학자, 박지원(1737~1805)은 조선도 청나라처럼 도로를 닦고 수레를 이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조선도 분명 육로를 개척하고자 노력했고 수레를 아예 안 쓴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 이상으로 늘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박지원이 참고했던 청나라 북부지방과 조선은 사정이 다르기 때문이다.

박지원과 같은 조선 후기 실학자인 이중환(1690~1752)은 저서 택리지에서 "물자를 옮기는 방도는 말이 수레만 못하고 수레는 배만 못하다. 우리나라는 산이 많고 들(평지)이 적으므로 수레가 다니기 불편하다. 그렇기에 배에 화물을 싣고 운반하여 생기는 이득보다 못하다."라고 말하면서 박지원과는 다른 주장을 폈다.

오랫동안 일상에서 배를 타온 만큼, 우리나라는 예전부터 우리 지형에 알맞은 고유하고 독특한 형태의 선박이 발전했다. 이러한 한국의 전통 선박을 한선(韓船)이라고 한다. 
 

'완도선' 고려시대에 청자를 운반하던 배로 1984년 발견되었다 /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완도선' 고려시대에 청자를 운반하던 배로 1984년 발견되었다 /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한선의 특징과 구조

한선은 중국의 정크선, 일본의 와선과는 다르다. 물론 우리만의 독특한 구조의 한선이 정착된 것은 고려 시대부터였다. 그렇기에 전형적인 한선의 모습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고려 이후의 것을 참고해야 한다. 그런데 한선은 일제강점기 이후 거의 사라져서 자료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70년대 이후부터 난파선이 속속 발견되면서 한선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해주었다.

우리나라 앞바다에는 항해 중 침몰한 수많은 선박이 있으며, 수중탐사가 꾸준히 진행되고 있다. 선박은 당시의 귀중한 유물도 들어있지만 선박 그 자체를 연구하는 데에도 귀중한 자료이다. 발견된 난파선 중에는 중국 혹은 조선시대의 배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배가 해상교역이 활발했던 고려의 것이었다.

한선은 배의 밑바닥(저판)이 평평하고 넓은 '평저선'이라는 특징이 있다. 평저선은 서양에서 많이 쓰인 V자의 첨저선보다 속도는 느렸으나, 조수간만의 차가 크고 깊이가 얕은 한국 해안에 적합하다. 특히 갯벌이 발달한 서남해안에서는 평저선 구조가 밀물 때 갯가로 내려가고 썰물 때에 그대로 앉을 수 있어 편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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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도1호선 재현 내·외부 구조도 /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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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한선 구조 / EBS 자료 참조 그림

한선을 만드는 방법을 추정하면 소나무 등의 원목을 결합해 튼튼한 밑바닥(저판)을 만들고 다시 이물비우(선수재)와 고물비우(선미재)를 조립하여 세워 붙인다. 이물비우는 뱃머리 쪽에, 고물비우는 배꼬리 쪽을 말하는데, 가로로 널판을 대어 박아서 만든다.

그리고 가룡목과 멍에를 배의 좌우로 뚫고 나오게 하고, 외판(측면)을 연결하며, 그 위에 갑판을 깐다. 외판을 연결하는 방법은 외판에 홈을 파서 겹쳐 붙이면서 쌓은 것이고 이를 '피삭'이라는 나무못으로 연결한다. 이를 클링커이음(clinker joint)이라고도 부른다.

이 방법은 중국 배가 판을 맞대어 붙여서 만들어지는 것과는 다르다. 중국 배는 배 내부에 격벽이라는 칸막이를 까는데, 이 칸막이는 외판이 수압을 견딜 수 있께 지탱해 주고, 물이 들어와도 다른 칸에 들어오지 않게 막는다. 1976년 신안 앞바다에서 발견된 원나라 배인 신안선을 보면 중국 배의 격벽 구조를 알 수 있다.

반면 한선은 이러한 칸막이가 없다. 또한 못은 쇠못이 아닌 나무 못을 쓴다. 그 이유는 해체와 조립의 간편함 때문이다. 한선은 중국배보다 수명이 길었다. 배를 해체하여 썩은 부재와 못을 교체하고 다시 조립해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중국 배는 격벽과 쇠못이 있기에 해체가 쉽지 않다.
 

신안선의 격벽 구조 /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원나라 배인 신안선의 격벽 구조 /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중국과 일본에서도 부러워한 튼튼한 고려의 배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도 강력한 배를 만들었다고 한다. 고려사에 따르면, 궁예가 왕건에게 후백제를 공략할 배 100척을 만들라고 했고, 이 중 왕건이 만든 큰 배 10척은 길이 16보(30m)가 넘는 대형 전함이었다. 이는 중국의 것보다도 큰 것이었으며, 왕건은 송악(개성)의 호족 출신으로 해상 무역을 위해 튼튼한 배를 제작하는 기술을 갖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고려 초기에 등장한 과선(戈船)은 군함으로 사용됐다. 이 군함은 뱃전에 창검을 달아 적이 쉽게 올라오지 못하게 했는데, 이후 조선의 거북선에도 영향을 주었다. 1019년 여진족에게 납치됐다가 고려 수군에게 구출된 일본인 여인의 기록에 따르면 "선체가 크고 넓으며, 좌우에 망루가 각각 네 곳이고 뱃머리에 쇠를 씌워 적 배를 들이받는다"라고 설명했다.

고려 후기에 사용된 군함인 누전선(樓戰船)은 굵은 통나무 여러 개를 사용해 자연스러운 유선형으로 만들었다. 이물비우와 고물비우는 기존보다 더 두껍게 쌓아 파도에 대항할 수 있었고 밑바닥에는 단단하고 기다란 참나무를 어긋나게 박아 넣어 견고했다. 고려군은 이 누전선 덕분에 당시 극성이던 왜구를 제압할 수 있었다.

'범해소록(汎海小錄)'이라는 책에는 여몽연합군의 일본 원정 당시에 대해 “크고 작은 함선들이 파도 때문에 다 부서졌으나 유독 고려의 전선은 배가 견고하여 온전했다”라고 했으며, 또한 '고려사'에는 원나라의 우승이 원나라 세조에게 "강남(남송)의 배는 약하나, 고려의 배는 강하기 때문에 고려에서 배를 건조하도록 해서 다시 일본을 정벌하면 이길 수 있다"라고 했다.

 

과선 복원 그래픽 /
과선 복원 그래픽 / 한국콘텐츠진흥원 문화콘텐츠닷컴 www.culturecontent.com
누전선 복원 그래픽 / 한국콘텐츠진흥원 문화콘텐츠닷컴 www.culturecontent.com
누전선 복원 그래픽 / 한국콘텐츠진흥원 문화콘텐츠닷컴 www.culturecontent.com

고려시대 이전의 한선

그렇다면 고려시대 이전의 한선은 어땠을까? 한선은 아주 오랫동안 변천을 겪었고, 다양한 용도와 종류의 배가 있었다. 하지만 유물이 많이 남아있지 않아 추정이 쉽지는 않다. 삼국시대에는 몇몇 기록을 통해 고구려, 백제, 신라가 각기 다양한 배를 만들어 사용했을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초기의 배는 통나무배, 뗏목 등 원시적 형태의 배가 있다. 나무를 얽어 만든 뗏목은 비교적 구조가 단순해 전 세계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난다. 통나무배는 나무를 쪼개 속을 파서 만드는 것이다. 비봉리패총에서 출토된 배는 8000년 전 신석기 시대의 것으로 현재 발견된 것 중 가장 오래됐다. 통나무를 불에 그을리고 석기로 다듬어 만든 것으로 보인다.

경주 안압지에서 70년대에 출토된 나무배는 나무를 파서 만든 신라시대의 통나무배로 추정된다. 또한 2019년 4월에는 경주 월성에서도 40cm 크기의 신라의 나무배 모형이 출토된 적이 있다. 이들 유물은 원시적인 통나무배에서 선박의 형태를 갖춘 구조선(構造船)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통일신라 시대의 장보고 장군은 교관선(장보고 무역선)을 무역에 사용했다. 이 배는 자세한 기록과 유물이 없어 정확한 형태는 알 수 없으나, 기록에 따르면 일본인과 중국인도 이 신라배를 튼튼하다고 평가하고 자신들의 배보다 신라배를 이용하려고 했다고 한다. 그렇게 신라 말기와 고려시대부터는 점차 뱃전을 확대하고 돛대를 강화하면서 한선의 기본 형태가 갖춰지게 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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