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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하우스 운동'과 '모던 디자인', 현대 디자인의 원형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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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하우스 운동'과 '모던 디자인', 현대 디자인의 원형이 되다
  • 김강호 기자
  • 승인 2020.05.14 15: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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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부터 1933년까지 14년 동안 다양한 시도를 해온 건축공예학교 바우하우스,
바우하우스의 모던디자인, 커리큘럼, 공예와 예술 접목 등이 현대에 막대한 영향미쳐
모던 디자인 / pexels
모던 디자인 / pexels

[핸드메이커 김강호 기자] 전등, 벽지, 의자, 소파 등 우리 일상에게 흔한 생활용품의 많은 디자인이 어느 한 학교에서 고안됐다고 하면 믿어지는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이 산업용품의 디자인을 산업디자인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산업디자인의 시초는 바우하우스(Bauhaus)라는 학교에서 태동한 모던디자인이다.

그런데 뭔가 낯이 익은 이름이다. 바우하우스는 실제로 미술사나 디자인을 전공하면 꼭 배운다. 그만큼 중요하다. 바우하우스는 1919년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설립된 건축과 공예를 가르치는 학교였다. 현대에 많은 영향을 미친 이 학교를 알기 위해서는 학교가 설립된 당시의 역사와 변천 과정을 알아두어야 한다.

19세기 산업혁명의 가속화로 인해 대량생산체제가 자리 잡자, 영국에서는 수공예의 가치를 다시 회복하기 위한 윌리엄 모리스의 '미술공예운동'이 일어났다. 한편으로는 영국, 프랑스 등 다른 제국주의 국가들에 비해 후발주자였으나 단숨에 열강의 반열에 오른 독일은 당시 세계 최강대국인 영국을 따라잡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미술공예운동이 독일에도 영향을 주었다. 독일에서는 국격에 가장 중요한 예술, 공예 등을 영국 이상으로 끌어올리기 원했다. 이리하여 영국에 6년간 산업스파이로 있었던 헤르만 무테지우스는 1907년 독일공작연맹을 결성하게 되었다. 미술, 공업, 수공예 전문가들의 협력을 모색했던 독일공작연맹은 다시 바우하우스를 설립하게 되는 데에 영향을 미친다.
 

발터 그로피우스 / 위키피디아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 1883~1969) / 위키피디아

모든 조형 예술의 궁극적 목표는 건축이다.

원래 바우하우스의 뜻 자체가 독일어로 건축을 의미한다. 하지만 어원과 달리 바우하우스는 건축 위주가 아니었다. 왜 바우하우스는 건축에 공예를 끌어들였을까? 학교를 세운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 1883~1969)는 '조각, 회화, 수공예 등 모든 예술 분야는 미래의 새로운 건축을 위해 통합을 이루어야 한다'라고 선언했다.

발터 그로피우스는 건축가였지만 앞서 말한 독일공작연맹의 회원이기도 했다. 그는 영국을 앞서기 위해 모든 분야가 협력하여, 그것의 정점인 건축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바우하우스가 설립된 1919년은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망하여 패배감이 높아졌으며, 한편으로는 건축 수요가 매우 높아진 시기였다.

독일공작연맹 당시 1914년에 큰 논쟁이 있었다. 연맹 설립자 무테지우스는 독일의 발전을 위해 규격화와 대량생산을 주장했으나, 윌리엄 모리스의 영향을 받은 앙리 반데 벨데는 기계 생산이 노동의 가치를 떨어트며, 예술가의 자유와 개성을 중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앙리 반데 벨데는 자신을 지지했던 그로피우스에게 자신이 운영하던 공예학교를 맡기고 독일을 떠났다.

이처럼 당시 독일은 급격한 공업화로 기존 수공업과 산업, 예술의 차이가 모호해 혼란을 겪었다. 하지만 그로피우스는 중세 시절처럼 다양한 수공예가를 양성하고 수공예와 예술의 통합으로 독일의 전반적 수준을 끌어올릴 수 있다고 믿었다. 따라서 중세의 길드와 도제 교육처럼 바우하우스 교수는 마이스터라 불러졌고 학생들도 도제라 불러졌다.

튀링겐주 바이마르에 설립된 학교에서 학생들은 처음에는 6개월 동안 기본 조형에 대해 배우고, 이후에는 공예를 가르치는 '공예마이스터'와 예술을 가르치는 '형태마이스터'를 나누어 배웠다. 1925년에는 다시 작센안할트주 데사우로 학교를 옮겼다.
 

데사우 바우하우스 / pixabay
'데사우 바우하우스', 그로피우스가 직접 디자인했다 / pixabay

계속되는 바우하우스 운영진들의 갈등

하지만 그가 생각했던 이상적인 개념이 바우하우스에서 완전히 자리 잡은 것은 아니었다. 그로피우스는 중세식 도제 교육을 부활시킨다고 했으나, 교육 과정은 너무나 주먹구구식이었다. 또한 그로피우스는 젊은 시절에는 무테지우스에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생각을 바꿔 다시 규격화와 기계산업과의 연계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건축을 한다고 하면서, 수공예와 예술을 가르치고, 말과는 달리 기계 산업과의 연관도 없었기에 그로피우스의 행동은 모순되었다. 건축과 과정은 8년 만인 1927년에 겨우 개설됐다. 한편 바우하우스의 디자인 교수였던 이텐과 네덜란드 화가인 두스부르흐는 '예술을 위한 예술'과 '공예와 예술의 분리'를 주장하며 공방 교육을 주창한 그로피우스를 비판했다.

결국 이텐은 떠났고, 갈팡질팡하던 그로피우스도 1928년에 물러났다. 이후 스위스 건축가인 하네스 마이어가 새로운 학장이 되었다. 하지만 예술적 부분에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고, 생산적인 요소에만 치중한 마르크스주의자였던 마이어는 교수진과 갈등을 겪었고, 좌경화를 우려한 데사우 시 당국에게 해임되었다.
 

'카이저 이델 램프', 크리스티안 델이 1933년 만들었다. 실용성과 간결함을 모두 갖춘 바우하우스의 대표적 램프 / 위키피디아
'카이저 이델 램프', 크리스티안 델이 1933년 만들었다. 실용성과 간결함을 모두 갖춘 바우하우스의 대표적 램프 / 위키피디아

그리고 다시 루트비히 미스 반 데어 로에(Ludwig Mies van der Rohe, 1886~1969)가 1930년에 취임하였다. 그는 1932년에 학교를 베를린으로 옮겼다. 그리고 바우하우스를 건축 중심의 학교로 바꾸길 원했고 디자인은 공업생산이 가능한 것만으로 제한했다. 그러자 교수들은 순수예술의 폐지를 반대하며, 다시 새 학장과 갈등을 겪었다.

하지만 더 큰 문제가 있었다. 당시 나치 정권은 진보적인 성향의 반 데어 로에를 좋아하지 않았다. 결국 1933년 나치는 학교를 폐교시켰고, 바우하우스의 멤버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로피우스는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고, 하네스 마이어는 소련으로 갔으며, 반 데어 로에는 일리노이주 공과 대학에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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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x & Moritz / 위키피디아
바실리 체어 / 위키피디아
바실리 체어 / 위키피디아

바우하우스의 철학, 현대에 빛을 발하다

바우하우스는 약 14년을 이어왔다. 바우하우스의 역사를 보면 그 짧은 기간 동안에도 무수히 많은 혼란을 겪고 갈팡질팡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바우하우스가 오늘날까지 막대한 위상을 떨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이러한 혼란 속에서 나온 바우하우스의 시도와 변화가 미술과 디자인, 건축 등 다방면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바우하우스는 당시 명망 있는 수많은 유럽 지식인이 참여했으며, 기존 교육기관과는 다른 다양한 실험적 커리큘럼을 시도했다. 그리고 이 바우하우스의 미술 커리큘럼은 오늘날의 미술 대학 교육 과정을 만드는 모태가 되었다. 특히 오늘날 공예와 건축, 인테리어 등을 순수미술과 동등한 위치로 끌어올린 것은 바우하우스의 영향이 컸다.

그뿐만 아니다. 바우하우스에서는 예술보다 기능에 치중한 디자인인 '모던디자인'을 탄생시켰고, 이러한 모던디자인이 현대의 수많은 산업디자인에 영향을 미쳤다.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도 애플 제품을 간결하게 디자인하였고, 스스로를 바우하우스의 후계자라고 했다. 이케아 역시 기능에 충실하고 간결한 디자인의 가구로 성공을 거두었다.

철제 의자는 오늘날 당연했지만, 당시로서는 나무로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그로피우스의 제자였던 마르셀 브로이어(Marcel Breuer, 1902~1981)는 처음으로 스틸로 의자를 만드는 파격적 시도를 했다. 다리도 두개로 줄였다. 또한 바우하우스의 교수였던 바실리 칸딘스키가 만든 바실리 체어는 다시 브로이어의 의자를 보고 스틸을 구부리고, 가죽으로 팔걸이, 등판, 좌판을 연결해 만들었다.
 

바우하우스 램프 / pixabay
바우하우스 램프 / pixabay

산업디자인의 선구자이자 바우하우스에서 공부했던 빌헬름 바겐펠트(Wilhelm Wagenfeld, 1900~1990)는 바우하우스 램프라고도 불리는 WA24를 디자인했다. 최대한 단순하고 간결한 디자인을 채택하여 대량생산이 가능했다. 또한 화병, 식기 물잔 등 주방의 각종 테이블웨어를 디자인했다. 특히 소금과 후추를 담는 맥스모리츠는 오늘날에도 널리 쓰이는 디자인이다.

바우하우스는 처음에는 영국을 따라잡기 위한 독일인의 경쟁심에서 시작했고, 중세 시절의 수공예 정신을 회복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내 건축을 위한 노선으로 바꾸고자 했으며, 대량생산과도 타협을 택했다. 그 결과 산업과 예술이 타협하여, '디자인'이라는 아주 중요한 새 산업의 지평을 열었다.

중구난방처럼 보일 수 있으나, 바우하우스는 격동의 시기에서 현대적 미술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접목해나가는 성장의 과정이었다고 볼 수 있다. '기술과 예술의 융합'을 통해 예술의 지평을 열고자 했던 바우하우스의 정신은 설립 1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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